넓게는 진보, 좁게는 좌파 진영에 깊이 뿌리박은 사유 습관 하나가 있다. 전반적인 경제적 위기가 덮쳐서 사람들의 경제적 삶이 피폐해지면 이들이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과 계급적 불평등에 눈뜨게 되고 급진화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실로 오래 묵은 전통이요 인습일 것이다. 1848년 혁명에 건강과 재산을 송두리째 바치고도 패배를 맛본 마르크스는 1850년대 내내 경기불황이 올 때마다 혁명이 임박했다는 헛된 희망을 친구 엥겔스에게 토로하곤 했으니까. 최근에도 세계경제 위기 때문에 다시 전세계적으로 계급투쟁이 격화되고 자본주의의 위기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역설하는 식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는 헛소리다. 그것도 인류 사상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터리없는 이야기다.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이렇게 진실과 빗나가 있는 단순무식한 발상도 찾아보기 힘들거니와, 이러한 생각이 현실정치 노선으로 표출돼 얼마나 많은 헛발질을 낳았고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과 피가 헛되이 사라졌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이 끼친 민폐의 규모는 헤아리기도 힘들다.
사람들이 급진적인 구호와 진보적 상상력에 관심을 가지고 동조하기도 하는 일은 오히려 경제가 상대적으로 호황일 때가 많다. 영화 가 닷컴 붐이 최고조에 달한 1999년에 나왔음을 기억하라. ‘다이쇼 민주주의’는 1차 대전의 승전국 일본의 경제 호황과 관련돼 있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한국 중화학공업의 상승과 맞물려 있다.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급진적 사상과 실험은 사람들의 삶에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대중적 관심을 끌 수 있으며 확산도 가능하다. 하지만 경제위기 때가 되면 상황은 반전된다. 한마디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당장 젖먹이 아이의 우유가 어떻게 될지, 우리 가족이 내년에 과연 깃들일 집이 있을지 아니면 뿔뿔이 흩어지거나 길바닥에 나앉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헤겔이 말한 적 있는 ‘죽음의 공포’처럼 존재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데 대한 공포가 엄습한다. 자신이 발 딛고 선 발판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때는 낭만적인 상상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헤겔의 말처럼 인간의 정신은 오로지 하나, 스스로가 서 있을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는 목적에만 맞추어지게 된다. 이들은 지극히 ‘현실적’이 되며 ‘안정’을 희구하며 현재 상태에서 가장 ‘확실해’ 보이는 해결책을 선호하며 그렇게 보이는 이들을 지도자로 삼기를 원하며 또 혼자만 살아남겠다고 설치며 혹시라도 내 것을 빼앗는 자가 없도록 ‘전체’가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를 희구한다. 대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확실하고 몽상적인 수사를 늘어놓거나 질서와 안정을 자꾸 흩트려놓으려 하거나 자꾸 분란과 불만을 선동하는 자들이다. 이를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런 목소리도 이 상황에서는 반성은커녕 짜증만 더 일으키며 묻혀버릴 뿐이다.
대략 이런 것이 세계가 경제공황에 휩쓸린 1930년대에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우리가 목도했던 바다. 이후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후자로 지목된 이들- 유대인을 위시한 ‘타자’에 해당하는 다른 인종, 동성애자, 자유사상가, 가지가지 좌파들-은 공공의 적이 돼버렸고, 전자를 자임하고 나선 폭력적·권위적으로 보수적 질서를 강요한 세력은 곳곳에서 강력한 정치적 지지를 얻고 아예 전체주의 체제를 만들어버렸다. 대공황이 처음 발생했을 때만 해도 ‘자본주의의 종말이 드디어 도래했다!’고 흥분하며 혁명적 행동을 준비하던 이들은 곳곳에서 사람들의 따돌림과 무시의 대상이 돼버렸다.
1930년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교훈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정치 행태를 왼쪽이다 오른쪽이다라는 1차원적 틀로 보아서는 안 된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경제적 안정성을 희구하며 현실주의적이 되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본능적 반응이다. 간덩이 작은 것들이라고 경멸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간 크기에는 분명히 평균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정치, 특히 민주주의 정치는 평균적인 인간들의 간 크기가 많이 좌우하게 돼 있다. 게다가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라고 하는 내용 또한 따지고 보면 극히 가변적이요 유동적이다. 불안정 노동에 대해 직업 안정성을 요구하는 것은 보수적인가? 의료·주거·교육 및 보육의 높은 비용에서 오는 불안감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것은 진보적인가? 시장경제 원리에 맞춰 공공부문을 과감하게 민영화하겠다는 것은 보수적인가?
경제위기가 도래해 사람들이 애타게 삶의 안정을 희구할 때 이른바 진보 혹은 좌파의 관성과 인습에 밀려 ‘드디어 때가 왔다’고 세상을 바꾸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힘을 갖기 힘들다. 과연 이 상황에서 이렇게 하는 게 올바른 길인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변화와 상상력, 그리고 안정과 조심성을 갈라놓고서 전자는 진보요 후자는 보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1차원적 인간’이나 할 바다. 두 쌍 모두 건강한 인간 존재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전자가 혹은 후자가 중요하게 대두될 때가 있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물론 이 와중에도 확연한 차이를 갖는다. 안정성을 추구하는 방법에 진보적인 것이 있을 수 있고 보수적, 심지어 반동적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진보적 가치가 사람들이 그토록 희구하는 안정성을 달성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 진보 세력이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1930년대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했던 바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틈타 아예 판을 갈아버리자는 공산주의자들의 노선도 택하지 않았고, 생존과 안락을 위해서는 모든 인간적·민주적 가치를 내팽개치고 이웃을 적으로 몰아야 한다는 파시스트 노선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모든 이들이 함께 일하고 함께 쉬며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회민주주의의 가치야말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삶의 안정성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설득했다. 덕분에 스웨덴은 이웃 독일처럼 짐승이 되지 않고도 대공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이후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가장 역동적인 복지국가의 하나를 건설할 수 있었다.
진보와 민주주의를 말하고 싶다면
많은 이들이 대선 후유증으로 ‘멘붕’에 시달리는 정초부터 웬 대중심리학 이야기냐고? 대선 결과의 원인 분석으로 50대가 어쩌네, 한국 사회가 ‘우클릭’을 했네 하는 뻔한 이야기들이 또 나와 답답해서다. 좌우니 보수·진보니 하는 추상적 가치와 정치적 분류법은 식자들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다. 정말 대부분 생활인들의 머리가 무슨 마우스라도 된다고 보는가? 그래서 대포 조준하듯 선거 때마다 좌로 몇 클릭, 우로 몇 클릭 이동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불안할 뿐이다. 2012년 현재 5% 정도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이 원하는 것은 제발 생활의 안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간층이건 하층이건 20대건 50대건 취업자건 실업자건 모두 그러하다. 사람들은 그 가운데 각자의 조건과 세계관에 비추어 이 불안을 덜어주는 데 제일 도움이 된다 싶은 쪽에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 결과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패자라면 지금 할 일은, 지난 5년간 사람들에게 삶의 안정성을 확고하게 해줄 무슨 준비를 했던가와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력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는가 양쪽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의 보수화’라며 ‘배신당했다’라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진보를 말하고 싶다면, 그리고 민주주의를 말하고 싶다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을 안정시켜줄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경제위기 상황에서 진보 진영이 승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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