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씩 친기업적 입장을 가진 경제학자 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진정한 가치가 창출되는 것은 시장뿐이며 그 창출의 주체는 기업뿐 이라는 생각을 불변의 진리로 여긴다는 것 이다. 이런 믿음은 곧 시장에서 기업의 주도 로 벌어지는 것 이외의 일체의 경제활동에 대한 불신, 그리고 시장과 기업의 자유로운 행동을 가로막는 일체의 장애물에 대한 적 대적 태도로 이어지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 다. 정부의 과도한 재정지출을 통한 ‘비효율 적인’ 공공사업이라든가 빗나간 온정주의에 서 나오는 잘못된 재분배 등은 모두 진정한 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잠 깐의 눈속임이 아니라 진정한 가치의 창조에 기초한 부를 누리려 한다면, 사회가 나아갈 길은 오로지 시장과 기업에 최대한의 자유 를 허락하는 것일 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 게 된다.
그런데 이 가치는 화폐로 계산된 ‘시장가 치’인가, 아니면 사회 전체의 필요와 능력이 라는 관점에서 평가한 ‘사회적 가치’인가? 그 둘을 구별해 생각할 것을 제기하면 경제학 계에서는 마치 외계인 보듯 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는 자명한 우리의 직관에 근거하고 있다. 빌딩 청소부 아주머니는 몇 달치 임금 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야 명품 핸드백 하나를 살 수 있다. 즉, 시장의 가치 평가에 의하면 그 아주머니의 1천 시간 노동 과 특정 핸드백 하나가 등가 관계에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양심적으로 물어보자. ‘사회’ 의 입장에서 볼 때 정말 그 핸드백 하나가 우 리 공동체에 가져오는 가치가 그 아주머니 의 노동이 가져오는 가치보다 더 큰가? 검약 의 미덕을 저해하고 물질주의를 만연시키는 점에서 오히려 명품의 사회적 가치는 마이너 스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사회적 가 치’는 ‘시장가치’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18세기 이래로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한 주류 경제 사상의 전통에서는 ‘부’ ‘후생’ ‘가 치’ ‘편익’ 등의 개념이 마구 뒤섞여 있었고 이 런 시장가치와 구별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논의도 그다지 명확히 이뤄지지 않았다. 물 론 이 문제를 인식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 니다. 미국의 존 베이츠 클라크나 오스트리 아학파의 거장인 프리드리히 폰 비저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현실에 뻔히 드러나 있는 시장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괴리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고 는 해도, 그들이 도달한 결론 역시 영국 경 제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괴리는 현실에 존재하는 시장의 왜곡에 의해 벌어 진 일일 뿐, 이상적 상황에서 작동하는 이상 적 시장이라면 ‘자연가치’를 정확히 표현하게 돼 있으므로 결국 이것이 사회적 가치를 발 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 그들 주장 의 요지였다.
‘물물교환의 환상’이라는 신화
그런데 전통적인 경제학의 이러한 사고에 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사회 안에 존재하는 모든 욕구와 생산능력이 남김없이 시장에서 대표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그것이다. 이러 한 전제가 공리처럼 받아들여진 데는 또 하 나의 잘못된 신화가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 것은 경제는 기본적으로 모든 이들 간에 벌 어지는 물물교환이며, 화폐는 그것을 매개 하는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는 ‘물물교환의 환상’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시장이 라고 부르는 경제는 사실상 항상 화폐의 힘 을 매개로 해서만 조직되는 장이며, 따라서 물물교환이 아닌 ‘화폐경제’라고 부르는 것 이 옳다. 일정한 양의 화폐와 결합돼 구매력 으로 전환할 수 없는 욕구와 일정한 양의 화 폐를 수익으로 챙길 수 없는 생산능력은 화 폐경제에서 전혀 대표되지 않으며 철저히 배 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폐경제를 실질적 으로 조직하는 것은 자본의 투자다. 따라서 여기에서 행해지는 만사만물의 가치 평가란 사실상 ‘자본의 수익성’에 어느 만큼 기여하는가, 즉 막스 베버가 ‘자본 회계의 합리성’이라고 불렀던 것에 의한 가치 평가다.
이렇게 되면 제아무리 완벽하고 이상적인 시장제도를 갖춘다고 해도, 영리기업들이 산출하는 시장가치란 사회적 가치와 일치할 것이라는 논리적 필연성은 사라지게 된다. 시장가치란 사회 전체의 가치 평가를 포괄하는 자연가치가 아니라 영리 활동의 필요에 따라 주어지는 ‘자본 회계의 가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회 안에는 화폐경제에서 배제돼 제대로 표상되지 못하는 갖가지 욕구와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능력이 존재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는 시장가치와 얼마든지 괴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순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화폐경제의 자본 회계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확립하고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며, 이렇게 확립된 사회적 가치를 하나의 규범으로 해서 오히려 시장가치를 거꾸로 평가할 뿐만 아니라 화폐경제 및 영리기업의 활동을 조절·지도해나가는 지침으로 삼는 것이다.
경제학설사에 ‘제도주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소스타인 베블런, 존 모리스 클라크, 군나르 뮈르달, 칼 폴라니, 윌리엄 캅 등의 사상가들이 공유한 생각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스웨덴 같은 곳에서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경제정책 전반의 조직 원리로 삼은 ‘나라살림의 계획’(Planhushallning)이라는 원칙에도 큰 영향을 준 사고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주의경제학의 올바른 이름은 ‘사회경제학’- 이는 막스 베버가 스스로의 이론 작업을 부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라고 바꾸는 것이 정당할 듯싶다. 이들은 화폐경제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포괄하는 폭넓은 실체로서의 ‘사회’를 강조했고, 제대로 된 경제적 계산과 경제활동의 조직은 바로 그 ‘사회’의 단위를 염두에 둘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경제학은 아직까지도 중요한 문제점 하나를 안고 있다. 사회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이 모호하고 그 가치에 근거해 사회적 사실을 정리해나갈 ‘사회적 회계’를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제대로 표상되지 못한 욕구와 생산능력을 계측할 수 있는 방법과 단위가 어디 쉽게 개발될 수 있겠으며, 하물며 그것으로 회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그래서 사회경제학은 대공황의 기억이 흐릿해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에서 슬며시 퇴조해버렸다. 스웨덴에서도 이 원칙에 근거해 공공의 ‘생산적 소비’를 위한 재정지출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1990년대 이후 ‘생산성’을 앞세운 논리에 일정하게 밀리게 된다.
‘사회적 회계’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요컨대, 사회적 가치란 꼭 에이하브 선장의 피를 말렸던 모비 딕과 같은 존재다. 물속 어딘가에 분명히 있으며 불시에 발밑을 쓱 지나가면서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막상 잡으려 하면 도무지 잡을 길이 없으니까. 하지만 갈수록 사회적 가치를 포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21세기 세계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화폐경제로 포착되지 않는 인간과 사회의 행복까지 나타낼 수 있는 ‘대체 국내총생산(GDP)’을 개발하자는 노력도 그 한 예이다.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막다른 골목에 부닥쳐버린 현대 경제학이 스스로를 가둬버린 미로에서 빠져나갈 최후의 탈출구가 바로 다음의 질문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측량할 것인가. 그리고 자본 회계를 대체할 ‘사회적 회계’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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