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금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는 인식은 ‘억울하게 뜯기는 돈’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탈세자들에게도 굉장히 관대하다. 특히 재계 인사들이 탈세를 했다는 소식에는 ‘고래가 물을 뿜었나보다’ 정도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때가 많다. 이러한 인식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탈세, 특히 재계 거물들의 탈세는 국가권력의 기초를 허무는 것으로, 심각한 반국가 행위로 다스리는 것이 옳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을 ‘조세피난자’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병역을 기피한 자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조세도피자’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근대국가의 기초는 국가와 부르주아들 사이의 협력에 있다. 관습과 개인적 충성이라는 애매하고 희미한 사회적 유대에 기초한 중세의 정치권력과 달리 근대국가는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인 주권을 내건 강력한 장치로서, 모든 근대적 질서의 근간으로 자리잡는다. 이렇게 영토 내의 만사만물에 대해 강력한 질서를 강제할 만한 힘의 기반은 말할 것도 없이 ‘폭력의 독점’에 있다. 이는 엄청난 양의 관료기구와 경찰 및 군대 등의 폭력기구를 필요로 하며, 이는 다시 엄청난 양의 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근대국가는 그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의 조세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를 등에 업으면 부르주아들은 국내 교역이나 국제적 교역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를 점하며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조세 징수에 혈안이 된 근대국가에 붙들리게 되면 그동안 번 돈을 탈탈 털릴 위험도 크다. 이처럼 근대국가와 부르주아는 서로 협력하면 양쪽 다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적으로 굴면 다른 쪽은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는, 요즘 말로 하면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에 있다.
17세기 끝 무렵이 되면 양자 사이에 막스 베버가 ‘기념비적 동맹’이라고 불렀던 융합이 이루어진다. 부르주아들은 순순히 거액의 세금을 국가에 바친다. 국가는 이 돈을 군주의 사치나 변덕스런 정복 전쟁 등으로 낭비하는 일 없이 부르주아들의 영업에 도움이 될 만한 국가사업에 합리적으로 최대한 아껴서 지출할 것을 약속한다. 그렇게 해서 부르주아들의 이익이 늘어나면 다시 조세수입이 불어난다. 이 ‘기념비적 동맹’이 이루어진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국가권력이 뒷받침하며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오늘날의 화폐 체제다. 정부가 안정적 세수를 담보로 하여 채권을 발행하면 중앙은행은 이를 한 번 더 ‘유동화’해 무기명의 차용증서를 발행하고 이것을 그 주권국가의 권력이 미치는 영토 내의 모든 이들이 군말 없이 지불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영토 범위는 곧 ‘징세 권력’이 미치는 한계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중앙은행이 신사임당 얼굴 하나 실어 달랑 찍어낸 허망한 종잇장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반드시 세금을 내야 하며 그때 이 종잇장을 사용하면 된다는 국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세권력이 무너지고 그다음 화폐권력이 무너지며 그다음 금융체제가 무너지며 그다음에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사회적 무질서가 생겨나게 된다.
국가권력의 존재를 확인할 때이는 아득한 옛날, 즉 근대국가 초기에 벌어진 일일 뿐, 21세기에까지 이러한 논리를 확장해 ‘부르주아들이 탈세를 벌이면 통화 질서와 국가권력이 무너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이 아닐까. 천만의 말씀이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외환위기와 2009년 그리스의 재정위기는 이러한 ‘기념비적 동맹’과 그 기초로서 부르주아의 정직한 조세가 여전히 화폐와 근대국가 질서의 기초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두 나라 공히 그 재계와 권력층은 국가권력을 신뢰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조세 회피는 두 나라 모두에서 그 나라 지배층의 오랜 전통이 돼버렸고, 이는 결국 지하경제의 비대화와 통화권력의 취약성을 낳았다. 2001년 아르헨티나를 절망으로 몰아넣은 외환위기는 그 결과로 나타났다. 유로화로 자국 화폐에 철갑을 두른 그리스에서는 위기가 통화위기가 아니라 심각한 재정위기로 드러났고, 이는 다시 극심한 사회적 분열과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 때문에 조세 혐오와 국가권력 불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일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단순히 재계와 지배층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만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근원부터 붕괴되고 질서와 국가권력은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 반대로 ‘기념비적 동맹’을 20세기에 쇄신해 부르주아의 착실한 세금 납부로 재정과 사회와 국가권력이 모두 안정돼 있는 스웨덴 등 북유럽 나라들을 생각해보라.
지난주 국제적 탐사보도 저널리즘과 공조해 인터넷 방송 가 버진아일랜드 등 해외의 조세도피처에 계정을 열어둔 한국의 재계 및 지배층 인사들의 명단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우선 공개된 이들의 면면을 보니 전국경제인연합회·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을 이끈 지도적 인사들이고 입만 열면 윤리경영을 강조하던 이들도 연루돼 있다. 사안은 누가 보더라도 조세 기피 혐의가 짙은 것들이다. 과연 이번 사건은 국세청이 이들을 제대로 조사하는 계기가 될까. 박원석 진보정의당 의원실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금까지 국세청은 국외의 조세 회피 행위에 대해 까막눈에 가까운 무능력을 보여왔다고 한다. 그리고 외국으로의 조세 기피 행위를 무슨 선진 금융기법쯤으로 아는 국내의 분위기가 일이 이렇게 된 한 배경이 돼왔던 듯하다.
이는 더 이상 용납돼서는 안 된다. 지금은 한국의 국가권력이 한국의 재벌 및 자본 권력과 어떠한 세력 균형을 유지할 것인지 대한민국이 기로에 서 있는 시점이다. 개발독재 시절부터 우리의 국가권력은 재벌 및 자본 세력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아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십 몇 년 동안 국가권력을 압도하게 됐다고 여겨져온 재벌 및 자본 권력이 그 ‘기념비적 동맹’의 한 축으로서 과연 국가와 사회에 자신들의 몫을 제대로 돌려주고 심지어 그렇게 할 의사는 있는지가 지금 모든 이들의 초미의 관심사다. 이것이 지난해 선거 국면에서 거세게 일어난 이른바 ‘경제민주화’ 요구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기념비적 동맹’을 제대로 형성해내느냐 마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리스나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고, 스웨덴·노르웨이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 보수고 진보고를 떠나, 한국에 국가권력이 살아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 존재를 확인할 때다. 조세 의무를 기피한 혐의가 있는 이들은 낱낱이 밝혀내 응분의 처벌을 내려야 한다.
대한민국 미래 가름할 중대한 사안한 가지 덧붙여두자. 세계적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교수가 강조한 바 있지만, ‘조세피난처’니 하는 말은 보수 세력의 교활한 말장난이니 쓰지 말자. 납세의 의무가 무슨 천재지변이나 재난이란 말인가. 이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고 외국으로 도피한 자들이니, 병역기피자들과 동일한 의미에서 ‘조세도피자들’(Tax Defectors)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조세도피자들’에게 응분의 처벌을 내려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름할 중대한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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