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종의 역설처럼 들릴 수도 있다. 지난 200년간, 특히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한 1990년대 이후의 20년간 ‘일자리는 오직 기업만이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경제학의 공리처럼 되어왔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 경제의 실험에서 배워야 할 핵심적 교훈은, 완전고용이라는 사회적·정치적 목표를 실현한답시고 정부가 무리하게 자원을 퍼부어 일자리를 만들어봤자 비효율과 자원의 낭비만 발생시킬 뿐이며, 그 일자리 자체도 절대로 지속 가능하지 않아 정부의 자원 조달이 멈추는 순간 그대로 없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일자리가 사회적 가치를 실제로 창출하는 것이냐가 핵심 관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부가가치에 대해 혜택을 보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대가를 지불하게 돼 있고, 따라서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은 영구적 노동분업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예를 들어 괜히 빗자루 들고 길 청소 시늉만 하는 식의 공공근로사업이라면 아무도 이를 원하지 않으며 결코 지속될 수 없다.
‘사회적 가치=기업의 이윤’이라는 신화그렇다면 어떤 일자리가 실제 사회적 가치가 있는지, 누가 대가를 낼 용의가 있는지 등을 제대로 고려해 진정한 일자리를 조직하는 임무를 누가 맡아야 하는가? 기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업은 철저하게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이다. 따라서 대가가 나오지 않는 것에다 엄청난 양의 자원을 낭비하는 일은 결코 벌이지 않으며, 이왕 시작한 사업은 어떻게든 지속적으로 이윤을 뽑아낼 수 있게 사회적 요구와 필요에 악착같이 적응해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반면 정부나 여타 사회조직들은 각자의 여러 목적과 가치- 그것이 제아무리 숭고하고 이념적으로 바람직하더라도- 를 좇다가 ‘쓸데없는’ 사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십상이고 결국 자원 낭비를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진정한 일자리는 기업만이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지금은 사라져버린 공산주의 경제나 1970년대 이전의 과도한 국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거의 나오지 않은 질문이 있다. 이 똑같은 비판의 논리를 오늘날 대기업에, 그리고 이에 기초해 건설된 금융자본주의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199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산업과 일자리 조직을 거의 전적으로 시장과 기업에 맡기는 형태의 자본주의가 나타났지만 실업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됐다는 소식은 어디에도 없었고, 급기야 2008년의 경제위기 이후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되고 만다.
기업만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의 결함은 바로 ‘사회적 가치=기업의 이윤’이라는 선험적 믿음에 있다. 옛날 공산주의 경제가 정권의 이념과 정치적 목적 때문에 사회적 가치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비효율적인 자원 낭비를 해댔다면, 대기업은 바로 스스로의 이윤과 권력의 추구라는 목적 때문에 사회적 가치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산업과 일자리 조직의 임무를 방기해 사회적 비효율을 가져온다는 비판이 똑같이 성립한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기업은 생산비용을 보전하고 한 푼이라도 이윤이 남는다면 계속 생산을 조직하는 행위자로 나오지만, 독점 및 과점 대기업들이 지배하는 현실의 경제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목표로 삼는 이윤율에 상응하거나 장기적 경영전략에 부응하는 범위에서만 투자와 생산을 조직한다. 요컨대, 넓은 의미에서 ‘큰돈 되는 건수’에만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윤을 위해 비용 절감에 혈안이 된다. 물론 비용 절감은 사회적 관점에서도 효율성을 가져오는 측면이 있지만, 영리기업의 비용 절감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자신이 치러야 할 어떤 종류의 비용이든 사회에 전가시킬 수 있다면 최대한 전가시키려 들게 마련이다. 그 결과 기술적 차원의 적정 일자리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일자리는 항상 더 적게 된다. 요점을 추리면, 이들은 큰돈 되는 기회가 나올 때에 한해 그것도 소량으로 찔끔 일자리를 만들어낼 뿐이다. 여기에다 금융자본주의의 문제를 더해보라. 대자본이 아닌 모든 규모의 자본은 이제 각종 자산시장에서 ‘정상적 수익률’을 기대하며 움직인다.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이윤을 위해 산업을 조직하고 일자리를 만들고 기업을 경영하는 귀찮은 짓을 누가 하려고 하겠는가? 물론 정부와 각종 사회조직이 사회적 가치의 정밀한 계측과 그에 기반한 효율성 추구에 전력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는 (대)기업과 자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고 쓸모 있는 활동이라고 해서, 또 사회 전체에 노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이 모두를 짝지워 최대한의 효율적 고용으로 이끌어낼 것이라는 보장은 영리활동의 논리 자체 그 어디에도 없다.
베블런이 지적한 ‘사보타주’사람들이, 또 사회가 요구하는 일자리는 그렇게 ‘대박 나는’ 것이 아니다. 큰돈 되거나 크게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저 꾸준히 있고 또 꾸준히 생겨나는 일자리가 사실 대다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독일이나 스웨덴의 중소기업 중에는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서 세계시장의 큰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히든 챔피언’이 꽤 있다. 그 기초가 된 생산기술은 이런 종류의 일자리가 안정적으로 계속 생겨나도록 사회가 배려하는 가운데 오래도록 축적된 암묵지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자리, 당장의 영리활동 관점에서 보면 대단치 않지만 사회적·기술적으로 소중하고 필요한 일자리가 계속 창출될 것을 과연 오늘날의 대기업과 금융자본주의에 기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보면 철저하게 영리활동 원칙에 입각해 움직이는 대기업과 금융·자본 시장에 기초한 자본주의 경제 또한 사라진 공산주의 경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자리 및 노동분업의 조직을 등한시하고 결국 만성적 실업과 불황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 비효율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졌던 일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토스타인 베블런은 이를 ‘(영리적 계산에 대한 고려에서) 주의 깊게 효율성을 철회하는 짓’, 즉 ‘사보타지’라고 불렀다. 또한 영국의 홉슨이나 케인스, 스웨덴의 비그포르스 등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치경제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전통의 경제 사상가들이 누누이 지적했던 ‘자본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이 바로 이 문제와 닿아 있다.
21세기 정치경제학의 돌파구문제는 다시 사회적 가치다. 분명히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를 낳는 일자리만이 지속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에 의한 일방적인 중앙계획은 물론이고 맹목적으로 영리활동에만 골몰하는 대기업과 금융자본주의 또한 이런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그에 입각해 만족스럽게 산업을 조직하고 일자리를 창출해줄 수 있는 메커니즘인지 근본적인 의문에 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지 경제조직에다 사회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기능을 모조리 맡길 이유가 없다. 사회적 가치가 금전적 형태로 파악되는 이윤으로만 나타난다고 보는 사고방식도 버려야 한다. 사회적 가치는 접근하는 방향과 조건에 따라 기업의 이윤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포착되고 계산될 수 있다. 따라서 크고 작은 기업의 일자리는 물론이고 정부와 공공부문,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종교 조직 등이 모두 일자리와 사회적 가치 창출의 주역이 될 수 있다. 이를 체계적으로 계산하고 계획해 서로 조정과 조화를 꾀할 수 있게 해주는 경제학의 개발이 절실하다. 모름지기 이것이 21세기 (정치)경제학의 돌파구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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