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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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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시민’의 출현을 위하여

등록 2012-11-30 15:10 수정 2020-05-03 04:27

‘경제민주화’ 논쟁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이번 대선에서 여야를 초월해 하나의 시대정신같이 여겨지던 화두였고, 그래서 아예 선거 이전에 모든 후보가 합의할 수 있는 경제민주화의 최소 강령을 만들자는 논의까지 나온 바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선거가 한 달 남은 지금 이 주제는 거의 용머리에 달린 뱀꼬리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이 지면에서 몇 달 전 경제민주화에 대한 생각을 적어서 같은 말을 다시 할 생각은 없다. 새로 덧붙일 말은 이렇다. 경제민주화를 정치가와 지식인들에게만 맡겨놓고 그들의 입과 손을 쳐다보기만 한 것이 애초에 잘못이다. 몇백 년 전 정치민주화가 그러했듯, 경제민주화 또한 새로운 의식으로 자신을 일깨운 사람들을 주체로 해서 추진해야 한다고. 그 새로운 주체의 이름을 나는 ‘사회적 시민’이라 부르고자 한다.
먼저 이 말은 ‘도시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뷔르거’ 혹은 ‘부르주아’, 즉 ‘개인적 시민’과 대조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거의 1천 년 전 유럽에서 나타난 부르주아들은 공동체인 농촌의 장원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그 공동체와의 연을 끊고 도망나와 새 삶을 원하던 이들이 다수였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은 개인의 재산과 안전과 행복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추구할 수 있게 보장해주는 삶의 기회였고, 그 기회가 모든 이에게 보장되는 세상을 꿈꾸었고, 이것이 훗날 자유주의적 시민혁명이 싹트는 데 중요한 원천이 된다. 비록 중세의 도시도 주변 장원들에 못지않게 개인을 구속하는 여러 장치가 있었지만, 분명히 ‘개인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생각의 씨앗을 품고 있던 것은 도시 사람들이었다.

지난해 10월15일 서울역 광장에서 빈곤사회시민연대 회원들이 “빈곤사회 1%에 맞선 99%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며 집회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지난해 10월15일 서울역 광장에서 빈곤사회시민연대 회원들이 “빈곤사회 1%에 맞선 99%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며 집회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도시 사람들, ‘개인의 자유와 해방’ 씨앗

오늘날은 산업 시대이다. 그래서 도시도 다르다. 먼저 도시 주변을 둘러싼 것은 농촌 공동체가 아니다. 오늘날의 도시는 살던 곳이 산업 지대, 원료 지대로 변형돼 삶의 환경이 파괴되는 바람에 새로운 삶을 찾아 몰려온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런 산업사회 고유의 도시화는 지난 200년간 누적적으로 진행됐고, 특히 최근 20년간 지구화 속에 놀라운 가속도로 진행됐다. 그 결과 이제 지구촌은 인류의 절반이 도시 주민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들의 대다수는 자신이 살게 된 터전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기를 원한다. 서로가 낯설고 적대적인 소외된 개인들로서 아귀다툼의 경쟁과 각축전을 벌여 거기에서 패한 자는 그야말로 ‘뼈도 못 추리는’ 정글 자본주의에 지친 이들은 사람의 양심과 믿음과 최소한의 이웃 사랑이 살아 있는 공동체가 여기에서 다시 복원되기를 원한다. 그런 사회가 건설되지 않는 한 설령 개인이 일정한 성공과 위치를 확보했다고 해도 결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늘어가고, 개인의 삶과 행복은 다른 사람들 전체의 삶과 행복과 불가분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 것이 산업사회의 본질임을 깨닫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그래서 21세기의 도시화된 지구촌에서는 노동시장이 구조적으로 잘못돼 있다면, 사회복지가 근본부터 부실하다면, 교육 기회와 상거래 경쟁의 질서가 애초부터 불평등하게 돼 있다면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모두 불행해진다는 점을 자각하는 ‘사회적 시민’들이 자라나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는 옛날의 ‘개인적 시민’들이 일궈냈다. 대략 500년 전까지의 인간사회에서는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든 권력은 한 줌도 안 되는 왕과 귀족들에게 집중돼 있었다. 난폭 무도한 통치와 가렴주구를 일삼는 이자들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은 반역죄로 몰려 치도곤을 당했고, 압도적인 다수의 평민들은 몇천 년 동안 이런 불평등과 억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러다 이 ‘개인적 시민들’ 중 몇몇이 실로 고귀하고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양심과 이성이 명령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그래서 조지 워싱턴 같은 이들은 반역죄로 몰려 ‘목매달고, 창자를 빼고, 사지를 끊어내는’ 형벌을 선고받고도 분연히 일어나 혁명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왕과 귀족에게 압도적으로 독점돼 있던 정치권력을 재분배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정치·사회적 권리와 선거권·피선거권을 보장하는 민주화의 기적을 이뤄내게 되었다.

기술관료와 정치인 소관 된 경제민주화

하지만 정치적 민주화가 시민혁명으로 보편화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선명하게 떠오른 민주화의 두 번째 과제가 있다. 바로 사회·경제적 영역의 민주화다. 왕과 귀족의 권력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실제 권력이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 권력의 대부분은 대기업과 금융가로 대표되는 자본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 새롭게 나타난 대기업과 금융가의 과도한 권력 독점으로 사람들의 자유는 이제 정치적 억압이 아닌 경제적 곤란으로 가로막힌다. 따라서 이제 ‘민주화’의 과제는 이 자본, 즉 대기업과 금융기관과 국가의 경제기관들에 집중된 권력을 어떻게 재분배해 모든 사람이 노동자로서 소비자로서 독립 자영업자로서 경제적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게 할 것인지가 된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영역의 민주화’를 자신들 운동의 정체성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지속돼온 사회·경제 영역의 민주화운동은 지난 반세기 동안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운동의 전위라고 믿어졌던 노동계급은 운동의 전선을 버리거나 심지어 배신까지 했으며,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동력이 사라지자 사회·경제적 영역의 조직과 운영은 현대 경제학의 논리로 무장한 일부 기술관료와 정치가들의 소관으로 독점됐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목전에서 보고 있듯, 경제민주화라는 과제의 전진은 이들의 의향과 결단에 거의 전적으로 달린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 우두머리 정치인 한 사람의 판단이 뒤틀리면 순식간에 없던 일이 되고 마는 하나의 ‘시혜’에 불과했다는 것도 똑똑히 보았다.

고전적 민주화운동의 연속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이번 선거의 교훈이라면, 우리 스스로가 ‘사회적 시민’이 되어 경제민주화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복잡한 산업사회와 경제질서를 무시한 채 마구잡이로 경제적 요구를 내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옛날 개인적 시민들이 진정한 ‘자율’의 삶을 살려고 최소한의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했듯이, 우리도 땀 흘려 일해 경제적 운명을 자율적으로 만들어가려면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권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시장의 구조 개혁과 사회복지 강화, 공정거래 질서 등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이번 대통령 선거도 시대의 흐름에 가장 적극적으로 부합할 수 있는 정권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그것으로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임무가 떠올랐다. 진정한 경제민주화의 전진은 그 누구에게 맡기고 청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추진해나가야 하는 고전적 민주화운동의 연속인 것이다.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시민’이야말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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