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경제학은 여러 면에서 21세기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거의 손써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낙후된 것은 소비와 수요의 기초가 되는 인간 욕망에 대한 이론이다. 먼저 “똑같은 효용을 갖는다면 시(詩)나 압핀이나 똑같다”는 제러미 벤담의 말대로, 다종다기한 인간 세상의 여러 욕망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 양적인 차이로 환원한다. 그다음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그 욕망을 충족할 수단의 양은 제한돼 있게 마련이니 인간 행동에는 항상 그 유한한 수단으로 무한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선택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선택을 잘하는 것이 바로 ‘경제’의 문제라는 것이 그 골자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에는 ‘한계효용 체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재화는 소비량이 늘어날수록 추가되는 마지막 한 단위의 재화가 가져오는 효용의 크기가 줄어들게 돼 있다는 것이다. 단골로 등장하는 예는 ‘빵’이다. 제아무리 며칠 굶은 식신(食神)이라도 처음 먹는 빵이 안겨주는 기쁨보다 8개째 먹는 빵에서 얻는 기쁨이 작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인간의 욕망이 정말로 무한하다면 어째서 한계효용이 ‘체감’하는가? ‘먹을수록 냠냠’이라는 우리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한계효용이 줄어든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욕망이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경제학 교과서는 이렇게 서로 완전히 모순돼 보이는 ‘희소성 공리’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연달아서 가르치는 것일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어째서 150년이 다 되도록 누구도 이 모순을 지적했다는 소문이 없는 것일까?
이유가 있다. 인간 욕망에 관한 이런 관찰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재화가 항시적으로 부족해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활동이 주로 인간의 육체적·생리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 맞춰져 있던 농경시대, 기껏 산업혁명 초기에 나온 것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 가운데 ‘빵’이나 ‘옷’과 같은 것으로 충족될 수 있는 육체적 욕구는 절대로 무한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다. 인간의 몸뚱아리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빵’의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육체적·생리적 차원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갈수록 머리와 가슴에서 생겨나는 욕구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압도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정신적 공간(Mental Space)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석가모니의 관찰에 따르면, 우주 전체(Outer Space)만큼이나 크다고 한다. 정신과 감정에서 나오는 ‘비물질적’ 욕구는, 따라서 한계효용 따위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도서 수집에 열 올리는 마니아들을 보라. 언뜻 보기에 남은 생애를 모두 독서에 바쳐도 다 읽지 못할 만큼의 책을 이미 구입해놓았다 해도, 책에 대한 그들의 욕구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제도주의 경제학자 웨슬리 미첼은 독서광에 책 수집광이었다. 한없이 불어나는 책장 때문에 자기 집에서 주변인으로 밀려나게 된 그의 아내가 정말로 이 책을 다 볼 거냐고 다그치자 그는 모기 소리로 ‘혹시 알아’(I might)라고 대답했다나.
카를 멩거, 절박한 욕망부터 서열 매겨
이처럼 낙후된 농경시대의 물질적 욕망론을 150년째 가르치고 있는 경제학자들과 달리, 현실의 사업가들은 오래전부터 본질을 잘 꿰뚫고 있다. 만약 ‘옷’에 대한 욕망에서 육체적·생리적 욕구의 차원만을 본다면 의류시장은 이미 오래전에 더 팽창할 수 없는 포화 상태에 도달했다. 가끔 TV 화면에 나오는 아마존 오지의 원시 부족들조차 나이키 티셔츠와 후드티를 입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넘쳐나는 공산품의 대표주자 의류는 이제 온 지구, 온 인류의 몸뚱이를 다 덮은 셈이다. 하지만 ‘옷’에 대해 인간이 갖는 욕망에는 패션을 비롯한 다종다기한 상징과 기호의 차원 또한 존재한다. 그 차원에 이르면, 옷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무궁무진하게 계속 불어나고 있으며, 의류시장은 절대적 포화 상태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
그러면 최소한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는 명제는 부분적으로나마 진리인 것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인간의 욕망은 그 성격에 따라, 또 그 욕망을 둘러싼 인간 사회의 맥락에 따라, 또 자연과의 관계에 따라 실로 다종다기하며, 여러 욕망에 대해 작동하는 법칙도 서로 달라서 동질적인 양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경제학이 할 일은 그 다종다기한 욕망을 다 똑같은 것으로 보아 동일한 공간 안에 때려넣고서 ‘무차별 곡선’을 그어놓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여러 관점과 성격에 따라 어떻게 분류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그 분류에 따라 욕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어떻게 다변화하고 그 가치평가 또한 어떻게 다양하게 할 것인가 등이다. 이것이 카를 멩거가 했던 바다. 그는 최초로 한계효용 체감 법칙을 주창했던 자신의 저서 1판(1873년에 나왔다)을 절판시키고 죽을 때까지 인간 욕망에 대한 의학적·생리학적·역사적·인류학적 연구에 골몰해 인간 욕망을 분류하고, 또 모든 이들에게 가장 절박한 욕망부터 서열을 매기고자 했다. 그의 사후인 1923년에 출간된 2판에서 그 성과를 볼 수 있지만, 이 작업이 마음에 들 리 없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은 스승의 저작을 거의 매장시키다시피 해버렸다.
멩거가 선도적으로 시행했던 작업, 즉 인간의 욕망을 더욱 다각적으로 분석해 가장 절박한 욕구에서 가장 하찮은 욕구까지 서열을 매기는 작업은 ‘사회적 가치’를 찾아내고 평가하는 것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 작업이 갈수록 절박해지는 이유가 있다. 산업혁명이 21세기 들어 물질에서 정신과 감정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데다 지구라는 자연환경이 드디어 성장의 한계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희소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탄소 배출을 통제하자는 절박한 호소에 대해 아들 조지 부시 대통령이 내놓았던 대답을 생각해보라. “미국인들의 전통적 생활문화를 내줄 수는 없다.” 제대로 먹이고 돌봐서 제대로 가르친다면 스티브 잡스 같은 재주꾼을 무수히 배출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오늘도 밥이 없고 물이 없어 헤매다 전쟁터로 나가 팔다리를 잃고 있다. 인류가 정말로 최소한의 이성과 양심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의 눈에 봐도 경중과 서열이 분명한 이 욕구들이 시장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욕망은 양적인 효용으로 환원 가능하다”는 한마디로 동일한 것으로, ‘가격’으로 변환돼 가치평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멩거의 작업을 계승했던 환경경제학자 윌리엄 캅은 ‘사회적 최소한’(Social Minima)이라는 개념을 내놓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양심과 이성에 기초한 인간 욕망의 탐구는 압도적인 주류 경제학의 우위에 짓눌려 명맥을 제대로 이을지조차 기약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욕망에 윤리 거부하는 속물적 댄디즘안다. 어느새 이 ‘욕망’이라는 단어는 우파에서나 좌파에서나 식자들이나 완롱하는 물건이 됐다는 것을. 이 양쪽의 공통점은 이 말에 그 어떤 윤리적·도덕적 잣대도 걸쳐놓기를 거부하는 속물적 댄디즘에 있다. 하지만 갈수록 상황은 이런 식의 ‘쿨생쿨사’와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의 다종다기한 욕망에 대해 윤리적으로 반성하고 중요하고 유의미한 것부터 서열을 매기는 일을 계속 방기한다면, 조만간 우리의 유일한 욕망은 ‘물리적 생존’만 남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내란대행’ 한덕수 석달 전 본심 인터뷰 “윤석열은 대인, 계엄령은 괴담”
“백령도 통째 날아갈 뻔…권력 지키려 목숨을 수단처럼 쓰다니”
‘오징어 게임2’ 시즌1과 비슷한 듯 다르다…관전 포인트는?
새 해운대구청 터 팠더니 쏟아져 나온 이것…누구 소행인가?
한덕수, ‘200표 미만’ 탄핵안 가결땐 버틸 수도…국회, 권한쟁의 소송내야
‘내란 연장’ 한덕수 퇴진 외침…시민들 “국민에 맞서 탄핵 방해”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 한덕수 탄핵안…민주당 “내일 표결”
명태균 “윤 부부에 대우조선 ‘강경진압’ 보고”…전방위 국정개입 의혹
민주, 한덕수 27일 고발…“내란 상설특검 후보 추천 안해 직무유기”
‘윤석열 로펌’ 자처한 국힘 “국회의 헌법재판관 선출은 불공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