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시비로 시작된 싸움 이 북방한계선(NLL) 논란을 거쳐 이제 정상 회담 기록문의 존재 문제로 치닫고 있다. 실 로 점입가경이다. 그 와중에 광주시청과 중 앙정부 사이의 서명 날조 논란이 터져나왔 고, 노령연금 20만원 공약은 공약(空約)으 로 끝나버렸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국가에 대한 신뢰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떨어져버 렸다. 이는 정치경제학과 사회경제학의 차원 에서 볼 때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 심 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현 대적’ 국가를 가질 수 있을까?
‘산업사회 조정자’ 성격의 현대 국가
똑같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는 하 지만, 전근대 사회의 국가와 고도로 발달된 현대 산업사회의 국가는 다르다. 전근대 사 회의 국가는 ‘지배계급의 화수분’을 그 성격 으로 삼는다. 각종 생업에 종사하는 대부분 의 사람들을 놓고 이런저런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기득권 집단들이 군림하면서 그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장치가 전근대적 국가였 다. 그래서 영어 등 여러 유럽 언어에서 ‘부동 산’을 뜻하는 말과 ‘국가’를 뜻하는 말은 동일 한 어원에서 파생되었다. 즉, 국가란 ‘화수분’ 이다. 매년 어마어마한 조세수입이 저절로 안정적으로 들어오는데다 사회 전체의 만사 만물에 시시콜콜히 참견해 멋대로 할 수 있 는 권력을 가진 것이 국가이니, 사회 안의 모 든 형태의 부와 기득권은 국가권력과 무관 할 수 없다. 따라서 전근대적 국가에 필연적 으로 따라오는 문제는 이 ‘화수분’을 누가 먹 을 것인가다. 힘 좀 쓴다 하는 사회의 명사 들은 모두 두 패, 세 패로 갈려 파당을 만들 고 여기에 대부분의 평민도 휩쓸려 들어가 게 된다.
20세기 중반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서는 ‘산업사회의 조정자’를 성격으로 삼는 현대 국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업사회 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산업기술의 발달을 그 존재의 조건으로 삼는다. 이렇게 정신없 이 변해가는 기술에 맞춰 경제제도는 물론 사회 전반의 제도를 계속 업데이트해야 하며 동시에 사회·경제적 변화의 와중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마찰과 갈등, 그리고 사회적 비 용을 최소화하는 장치가 반드시 있어야 한 다는 필요가 생긴다. 이렇게 사회와 경제를 끝없이 현대화하면서 또 사회를 통합하고 인간적 가치가 관철될 수 있도록 만드는 임 무가 국가에 떨어진다. 따라서 현대 국가는 전근대 국가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우선 대 단히 똑똑해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함은 물 론, 사회 안의 다양한 집단과 계층을 아우르 는 깊은 신뢰를 얻고 있어야 한다.
당연히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주한 독일 대사가 독일과 스웨덴의 복지 국가 시스템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부분적으 로 그 원인을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 차이 로 돌리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스웨덴 사람 들은 국가에 대한 신뢰가 크기 때문에 이를 테면 연금 문제를 국가의 조세와 재분배로 해결하는 제도가 가능하지만, 독일 국가는 그만큼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에 복지 시스템 을 국가 주도로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독일 사람들도 부러워할 정 도의 신뢰를 스웨덴 국가가 쌓아올리게 된 게 물론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지만, 가장 중 요한 기초 하나는 ‘국가는 어느 집단이나 계 층의 전유물이 아닌 불편부당한 공익의 대 표자’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자리잡았다는 데 있다. 사회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서 국 가가 노동계급의 전유물이 되는 것도 아니 며, 보수 및 자유주의 정당이 집권한다고 해 서 국가가 ‘부르주아’들의 것이 되는 것도 아 니라는 게 지난 몇십 년간 스웨덴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확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경제학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 의 하나는 ‘사회적 자본’이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신뢰’다. 사회적으로 신뢰가 축적되는 데서 국가에 대한 신뢰가 핵심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산업사회의 요구에 걸맞은 현대 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통해 국민 대다수의 신뢰를 조직한 나라는 복이 있나니. ‘제3차 산업혁명’의 내일이 그들의 것이리라.
신뢰, ‘사회적 자본’의 가장 중요한 요소
21세기 초입의 세계경제에 다가오는 변화의 물결은 실로 그 파고와 폭을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 물결에 휩쓸려 산산조각이 날 것인가, 아니면 이 물결에 올라타서 미증유의 신천지로 나아갈 것인가. 선진국들은 어디라 할 것 없이 후자가 되기 위해 자기 나라의 경제 및 사회 시스템을 변화하는 산업기술에 맞도록 바꾸는 작업에 여념이 없다. 다가오는 도전은 만만한 것이 없다.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대학 교육 개혁은 어떤 것인가, 고령화와 탈산업화의 조건에서 연금이나 의료보험 등 사회정책의 기조는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등등. 이때 신뢰받는 국가를 가진 나라가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순탄하게 나라 전체에 필요한 사회적·경제적 재구조화 작업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다. 이 문제들은 그 자체로도 많은 비용이 들지만 또한 엄청난 규모의 사회적 마찰과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다. 신뢰받는 국가가 부유한 나라라면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현명한 해결책으로 일사불란하게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라면 이 문제들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사회적 갈등만 장기화되고 비용은 산더미처럼 늘어나는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국가를 돌아보자. 길 가는 이들을 붙잡고 ‘한국의 국가가 불편부당하게 공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지난 반세기 동안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그 눈부신 성취와 함께 수많은 비효율의 요소와 사회적 비용을 낳는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다. 국가기구에 대한 신뢰 하락은 후자의 하나다. 급속한 사회적 변동의 와중에 국가는 불편부당과 신뢰는커녕 온갖 기득권과 파당적 이익집단들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도구가 아니냐는 세간의 불신을 착실히 축적해왔다. 1990년대 이후에는 더했다. 기실 그동안 한국에서 민주주의란 현실적으로 ‘왕을 선거로 뽑는 것’이 돼버렸다. 그 결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조선시대 당파 싸움의 ‘사화’(士禍)와 ‘환국’(換局)에 맞먹는 난리를 치르게 되었고, 나라 전체는 몇 개의 정치세력으로 확실하게 갈라져버렸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앞에서 말한 현대 국가가 아닌, ‘권력을 잡은 세력의 화수분’으로서 전근대적 국가의 성격을 갈수록 강하게 띠고 있으며, 이에 국가에 대한 사회의 신뢰는 바닥 없이 추락하고 있다.
현대 국가로 거듭나게 할 계획과 준비
내가 보기에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코리아 리스크’의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는 바로 국가의 전근대성과 그로 인한 사회적 신뢰 하락이다. 향후 집권해 대한민국을 운영하려는 포부를 가진 집단이나 개인이 있다면 꼭 명심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지금 중요한 과제는 단순한 정권 획득이 아니라 현명하고 효율적이면서도 불편부당한 국가를 새로 구축해 사회의 신뢰를 얻어내는 것이다.
우파에서 좌파까지 모든 정치세력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 전체의 통합과 신뢰 구축이라는 과제를 우리 정파의 파당적 이익보다 앞세워본 적이 과연 있는가. 앞으로 권력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게 된다면 국가 전체를 혁신해 그러한 현대 국가로 거듭나게 할 구체적인 계획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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