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산티아고의 눈물, 그 순수한 다짐

이인영의 등산화·순례자 증명서·수첩
등록 2012-02-04 10:42 수정 2020-05-03 04:26

2008년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 800km, 우리네 식으로 2천 리 길을 걸으며 세 가지 버릴 수 없는 물건을 남겼다. 45살 내 나이에, 내 인생의 하프타임에 얻은, 정말 보물과 같은 물건들이다.

하나는 순례길 내내 신고 다녔던 등산화다. 지금은 낡고 군데군데 훼손되었지만 버릴 수 없다. 새 등산화만 세 켤레째 샀는데도, 내 발을 지켜준 이 등산화를 어쩌지 못한다. 순례길 전후로 모두 40일간 135만 보를 걸으며 이미 내 몸처럼 여겨진 탓이다. 지금도 다른 어떤 등산화보다 편한데, 이 마음도 모르고 아들 녀석에게 신어보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다음은 협회에서 준, 길을 완주했다는 증표다. 스탬프 찍은 순례자 증명서, 출발 날짜가 적힌 가리비 껍데기와 같이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 뿌듯한 훈장 같다. 돌아오는 길에 사둔 2권의 가이드북과 함께, 언젠가 아내와 함께 산티아고 길을 다시 나설 때 들고 갈 계획이다. 산티아고 길에서 초짜들에게 보여주면 부러움 덩어리가 될 상상에 즐겁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꼬박 26일 순례 기간을 포함한 40일의 기록을 담은 수첩과 사진들이다. 매일 저녁 일지를 작성하듯 꼼꼼하게 써내려간 내 명상과 사색의 편린이 담긴 4권의 기록들, 동행하는 이가 없어 그저 나 혼자 담아두었던 1천 장이 넘는 사진 파일이다. 가끔 꺼내보다가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잃어버릴까봐 안절부절못하곤 한다.

다른 한 가지, 내 마음속에 남긴 산티아고 추억은 그 길의 끝에서 태운 바지·티셔츠 등 옷가지들이다. 그 영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내 몸의 한 꺼풀을 다 태워서 벗어버리는 느낌으로 남았다. 피스테라에서 지는 해와 함께 내가 치른 그 의식은 찬 바람 속에서 경건하기만 했다. 욕망을 버려 길에 내려놓고, 원망을 벗어 바다에 빠뜨리고, 영성의 맑은 세계를 기도하며 동경했었다.

그 길에서 참 많이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한 동지를 떠나보내며 퍼붓다시피 울었던 기억 못지않게 울었다. 민주화 세력의 몰락에 서러워서도 울고, 지켜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서도 울고, 잘해내지 못한 잘못을 뉘우치면서도 울었다. 그 눈물만큼은 거짓이 아니라 믿기에 나에게 아직 순수함이 남아 있구나 생각하며 속세에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살 정도였다. 그 길에서 내가 새로운 용기와 다짐을 얻었다면 너무 화려한 수사일까?

어쨌든 그런 추억이 서린 등산화, 증명서, 수첩을 어찌 버릴 수 있으랴. 오늘 나의 꿈, 나의 삶을 온전히 새롭게 지켜주는 것들이다. 내 아내, 내 아들, 내 어머니는 내 삶을 지탱해주는 귀한 분들이다. 그 대표선수인 내 아내가 결혼식 때 끼워준 반지의 유일한 경쟁자는 바로 이것들이다. 내 아내여, 나를 괴롭히려면 이 보물들을 훔쳐가라! 그러면 나는 백기투항할 것이다. 이렇게 말할 정도다.

이인영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