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신문 지상이나 방송 화면에 유난히 군복을 입은 이들이 많이 등장했다. 모두 극적인 장면이었다. 아련한 군 복무 시절의 기억을 꺼내들게 만들었다.
첫 번째 부류는 브리핑을 잘하는 군인들이었다. 지난 5월20일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발표를 생중계로 보며 브리핑이 참 잘 준비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깔끔한 진행과 매끄러운 통역, 극적인 ‘결정적 증거’의 공개, 실물 크기로 준비한 북한산 CHT-02D 어뢰 도면, 기자의 질문을 예상하고 준비한 동영상 화면…. 그때 떠오른 건 ○○사단 작전처에 근무하며 상부에 보고할 브리핑·회의 자료를 밤새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가 반복한 작업은 상급 지휘관의 지적(혹은 취향)에 따라 문장의 표현을 약간씩 고치거나, 문서의 자간·행간 간격을 조정하거나, 자료의 중요 부분을 표시하는 ‘띠지’를 예쁘게 붙이거나, 그냥 봐도 괜찮은 도면에 이런저런 색칠을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니 크게 불만은 없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안보를 튼튼하게 하고 국방력을 키우는 일이라고 믿고, 초등학생 과제 같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이번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 발표를 보며 뒤늦게 깨우친 바가 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멋들어진 브리핑을 하던 장군님들은 실상 야전에서 무능의 극치를 드러낸 장본인들이었다. ‘적이 몰래 침투해 들어와 아군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가하고 유유히 도주한 사건’을 너무나도 세련된 방식으로 브리핑했다.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옛날 내가 만든 브리핑·보고 자료들도 이런 식으로 쓰였던 것일까. 이번 브리핑을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장병들에게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두 번째 부류는 국민을 향해 총을 쏘는 군인들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평화적으로 반정부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을 저격수와 탱크를 동원해 무력 진압했다. 학살이었다. 이 또한 기억을 일깨웠다. 현역 시절 들여다본 작전계획 중에는 이른바 소요사태가 발생해 군이 개입할 경우의 상세한 지침을 규정해놓은 게 있었다. 지금도 그런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훈련을 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타이 방콕의 살벌한 풍경이 꼭 30년 전 이 땅에서도 벌어졌고 그 사건이 지금도 제대로 민주항쟁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정부가 5·18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역사적 교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노라면, 이 두 번째 부류의 군인에 대한 치 떨리는 감정을 여전히 기억에서 씻을 수 없다. 군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말은 아직도 군부대의 담장을 넘지 못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실전에는 무능하고 브리핑에는 강하며 민주적 가치는 뿌리내리지 못한 게 우리 군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군통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군을 신뢰하는 듯하다. 천안함 사건을 두고도 국민의 안보 불감증만 탓하는 걸 보면 분명하다. 국민이 믿지 못하는 군을 대통령만 신뢰한다면 이야말로 가장 우려스러운 안보 불감증이다.
이번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아직도 여러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민·군 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사실임을 분명히 하려면, 발표에서 스스로 드러낸 군의 실패에 대해 강도 높은 처벌을 앞세워야 한다. 46명의 장병이 공격을 받아 숨졌는데도 고위 지휘관들은 멀쩡하다면, 앞으로 이 나라의 안보는 자기 목숨을 지키려 아등바등해야 하는 사병·부사관들의 몫으로 다 넘기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번 기회에 국민은 ‘안보몰이’의 대상이 아니라 안보의 최고 지휘관임을 명확히 해준다면 군복을 입은 이들에 대한 저 찜찜한 기억들을 말끔히 지워버릴 계기가 될 듯싶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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