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이제 우리는 낡은 시대정신의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변화와 쇄신을 향한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여긴까진 나쁘지 않았다.
“새로운 진보는… 중도적 가치, 실용적 정신이 반영되는 진보입니다.” 진단과 방향에 동의할 순 없었지만, 여기까지도 참고 읽어줄 만했다.
그런데 “막연한 몽상이 아닌, 실증적이고 실천 가능한 ‘과학적 진보주의’여야 합니다”라는 대목에선 흔히 하는 말로 ‘확, 깼다’. 진보주의 앞에 붙은 ‘과학적’이란 수식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해, 그냥 웃어버렸다. 그렇게 1월11일 새롭게 뽑힌 대통합민주신당의 손학규 대표가 보낸 취임사는 웃기기도 했고, 정체를 알 수 없어 헷갈리기도 했다.
지난 10년 동안 정권을 잡아온 세력들은 지금 ‘정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이 어떤 정치세력인지, 지지세력은 누군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진보를 말하지만, 엉뚱하거나 퇴행적이기까지 하다.
1월29일 통합신당의 김효석 원내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민주평화개혁 세력은 낡은 틀에 갇혀 시간을 소모하고 민생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세력을 표현하기 위해 ‘민주’ ‘평화’ ‘개혁’이란 세 단어를 병렬적으로 나열했다. 통합신당의 어떤 인사들은 ‘민주·평화·개혁’이란 말에 ‘진보’도 꼭 빼놓지 않고 읊조린다. ‘합리적 보수’나 ‘신보수’를 표방하는 보수 정치세력보다 단어 사용도 많고 훨씬 복잡하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은 정체성을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이런 용어의 문제점을 언젠가 이렇게 털어놨다. “평화민주개혁 세력은 의미가 담기긴 하는데, 우리가 평화민주 세력이라고 하면 한나라당은 마치 전쟁을 원하는 세력처럼 비쳐질 수 있다.” 그렇다. ‘민주’란 용어를 어느 특정 정치세력이 독점하기엔 1987년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꽤 많이 진행됐다. 참여정부나 열린우리당, 통합신당이 ‘평화’란 단어를 독점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들은 지난 4년 동안 이라크에 꾸준히 군대를 파병해왔다.
자칭 ‘민주평화개혁 세력’이라는 정치세력들이 본격적으로 혼란을 보이기 시작한 건 2004년 총선 직후다. ‘실용’이란 단어가 강조되면서, ‘실용 대 개혁’ 논쟁으로 번졌다. 논쟁에 그친 게 아니라, 분양가 원가 공개 등 실제 정책과 노선에서도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문제로 ‘민주평화개혁 세력’이 분열되고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을 등질 때가 혼란의 극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방에 반대하는 ‘진보세력’과 ‘민주세력’을 빗대 ‘좌파 신자유주의’로 몰며, 교조적 논리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진보’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부드러운 진보’란, 다소 생뚱맞은 표현의 어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에서 찾아야 할까, 아니면…. 한때 ‘따뜻한 진보’가 유행하더니, 이젠 진보가 너무 딱딱했던지 부드러운 진보가 나왔다. 대선 패배 뒤 ‘친노’를 대표하는 유시민 의원은 통합신당을 떠나면서, 부드러운 진보와 같은 말인 “유연한 진보”를 얘기했다.
‘새로운 진보’(신진보)의 변형물들은 방점을 달리하면서 쏟아져나온다. 정창교 통합신당 원내기획실장은 “대안적인 생산적 담론을 내놓지 못하면서, 레토릭(수사)의 장난에 그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리 봐도 ‘과학적 진보’는 그 레토릭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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