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국회 목욕탕 개근생 ‘양강’

등록 2009-02-19 15:50 수정 2020-05-03 04:25

국회 의원회관 지하 2층에는 일반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낯선 장소가 있다. 국회의원 전용 목욕탕, ‘건강관리실’이다. 의원 목욕탕은 욕실과 수면실, 휴게실 등으로 이뤄져 있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러닝머신 등을 갖춘 헬스장과 이발소도 있다.
이용료는 현재 무료다. 17대 국회 초반까지만 해도 60만원을 받았다. 연회비제로 운영됐던 까닭에 1년에 한 번을 찾든, 매일매일 이용하든 이용료는 똑같았다. 목욕탕에서 제공하는 간단한 음료와 스낵류는 실비를 받고 있다. 이발비는 1회 8천원이다.
의원 목욕탕이라고 하면 대부분 호화 시설을 갖춘 것으로 오해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1995년 문을 연 뒤 개·보수를 자주 하지 않아 시설이 낡은 편이다. 특히 샤워기의 수압이 낮아 상대적으로 수압이 센 가운데 부분 샤워기로 사람이 몰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의 강기정 의원은 의원 목욕탕의 1호 출근자다. 지역구와 자택이 광주 북구에 있는 강 의원은 서울 여의도 오피스텔에서 혼자 산다. 여의도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그가 재미를 붙인 일 가운데 하나가 ‘아침 일찍 의원 목욕탕 가는 것’였다. 주말을 제외한 거의 매일 의원 목욕탕을 찾는 그는 2008년 라는 책까지 냈다. 책 전체가 목욕탕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강기정 의원과 함께 의원 목욕탕 ‘양강’으로 자리매김했던 인물은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다. 2008년 4월 총선 때 서울 전셋집 보증금마저 선거비용으로 써버린 강기갑 의원은 머무를 곳이 없어 최근까지 국회 의원회관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양강’에서 이탈했다. 2008년 12월 중순 여의도에 오피스텔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냉탕에서 잠수했다가 솟아오르는 긴 머리, 긴 수염 ‘도인’의 모습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의원 목욕탕은 종종 ‘물밑 대화’의 장이 되기도 한다. 목욕탕이 또 다른 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무엇보다 ‘알몸’으로 상대방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만큼 목욕탕 회동이 갖는 의미도 남다르다.
‘입법 전쟁’이 한창이던 1월4일의 일이다. 이날 오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신년 인사를 다녀온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와 주호영 원내수석부대표, 김정권 원내부대표 일행이 의원 목욕탕을 찾았다. 이들이 목욕탕에서 맞닥뜨린 사람은 민주당의 원혜영 원내대표와 서갑원 원내수석부대표 등이었다. 이날 여야 대치가 잠시 잦아들자, 이 틈을 이용해 목욕탕을 찾았던 것이다.
사전에 의도된 만남이었을 수도 있지만, 목욕탕에서 만난 양당 사령탑은 20여 분간 ‘물속 대화’를 나눴다. 물론 목욕탕에서 깊이 있는 회담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격앙된 양쪽의 감정을 녹이기에는 충분했다.
이계진 한나라당 의원은 2004년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은 당(黨)은 달라도 탕(湯)은 같이 쓴다. 그래서 여야 의원들이 탕 속에 들어가 있으면 ‘한탕속’이 되는 것이다. ‘한통속’이 아니라 ‘한탕속’! 벌거벗은 의원들은 원초적으로 아무 구별이 없다. 옷 입고 당의 ‘깃발’ 아래 섰을 때만 여당·야당이 있는 것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