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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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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라면 생각

등록 2008-03-14 00:00 수정 2020-05-03 04:25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라면-국수-설렁탕 사리.’
요리에 그리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금세 계보가 같은 음식이란 걸 알 수 있다. 면? 그렇다. 덧붙이자면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톺아보게 만든 면류 먹을거리들이다.
3월5일,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가격이 상승하는 밀가루를 쌀로 대체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고정관념을 바꿀 것을 주문했다. 대통령의 ‘역발상’을 칭송하는 청와대 관계자의 부연 설명도 있었다. “밀가루값이 비싸다면 설렁탕에서 사리를 빼든지, 아니면 사리의 재료인 밀가루를 쌀로 바꿀 정도의 고정관념 파괴가 있어야 한다는 취지다.”

60~70년대 박정희의 환생일까?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원래 설렁탕에 면을 집어넣는 것은 쌀이 부족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는데 거기에 드는 밀가루가 엄청나다”고 밝혔다. ‘21세기 박정희’(이명박)는 20세기 박정희의 역발상이 만든걸까?

대표적인 서민 먹을거리, 아니 국민 먹을거리라 할 만한 라면에도 눈길을 주셨다. 2월27일, 이명박 대통령은 첫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평소에 라면을 많이 이용하는 서민들은 100원 올랐다는 것이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예의 여러 언론매체는 앞다퉈 라면 특집을 내보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에 부정적이었던 방송사마저 라면 원가의 거품을 파헤치겠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대통령은 라면과 달리 아직 자신이 당선된 이후 수천만~수억원씩 뛴 아파트값을 잡겠다는 의지를 내비치지는 않았다. 좀 삐딱하게 보는 건지 모르겠으나, 이런 걸 따지고 들어가면 대통령의 라면값 걱정은 왠지 위선적이란 느낌마저 든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대통령이 당선 뒤 부동산값 등 시장에 줄곧 물가 인상의 신호를 보내놓고선, 라면값을 갖고서 얘기하는 건 모순”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면발에 대한 집착을 압축하면 ‘쌀가루’가 된다. 대통령은 1월21일 인수위 시절 농어민단체 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동남아에서도 다 쌀국수를 먹는데 우리만 밀가루 국수를 먹는다. 우리도 비싼 밀가루를 쌀로 대용할 수 없는지 연구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밀가루가 쌀가루보다 싸다’ ‘자급률이 높긴 하지만 미국 등의 압력에 밀려 쌀을 수입하는 게 현실이다’는 등의 합리적인 반론을 제시하기 전에, 좀 찜찜한 게 있다. 물가 인상의 근본 원인과 대책에 접근하는 대통령의 시각이 너무 피상적인 게 아닌가란 의구심이다.

대불공단의 ‘전봇대 뽑기’로 상징되는 이명박식 해법은, ‘MB폰’으로 이어졌다. 대통령과 기업인의 ‘핫라인’이란다. 물론 노동자나 노동단체와의 핫라인은 없다. 국수와 설렁탕을 들면서는 밀가루를 쌀가루로 대체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고물가 시대 서민의 고통은 몇 가지 먹을거리에 대한 대통령의 걱정으로 되레 희화화됐다.

이 대통령은 복잡한 걸 의외로 간단히 설명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또 복잡한 많은 걸 간단하게 덮어버리는 재주가 있다. 후자가 삐딱한 이의 괜한 기우였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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