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 한나라당 ○정남이오.”
쇳덩이라도 매달아놓은 것처럼 ○정남씨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국회 앞 아무개 호텔 커피숍은 방음이 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귀대기’(벽이나 문틈에 귀를 대고 엿듣는 취재 방식)를 구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옆방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
직업 탓이었을까. ○정남씨의 중후한 자기소개는 바로 옆방에서 늘어져 있던 기자들의 레이더를 일깨웠다. 다들 일제히 ‘○정남이 누구지?’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정남씨의 통화는 순조롭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이 ○정남씨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정남입니다. 한나라당 ○정남입니다.”
○정남씨가 안타깝게도 자신의 이름을 두 번이나 반복했을 때, 그의 음성에 실려 있던 쇳덩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정남씨의 세 번째 자기소개는 차라리 애절했다. “바를 정(正)! 사내 남(男)! 한나라당 ○정남인데, 기억 안 나십니까?”
“풉!” 엿듣는 자의 도리가 아닌 줄 알지만, 기자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노란 개나리, 선홍빛 진달래와 함께 여의도에도 정치의 계절이 상륙했다. 4월 말에는 재·보궐 선거가 치러진다. 5월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원내대표 선거가 있고, 10월에는 다시 재·보궐 선거다. 그리고 2010년 지방선거까지, 정치 일정은 숨가쁘게 이어진다.
○정남씨는 누구인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채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면, ○정남씨는 ‘선량’의 꿈을 위해 열심히 이름을 알리고 다니는 정치 지망생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남씨의 정체가 아래위 낡은 콤비를 갖춰입고 느릿느릿 여의도를 배회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라면, 그는 ‘정치 낭인’일 확률이 크다.
정치 낭인은 다시 세 부류로 나뉜다. 우선 나름의 정치적 식견을 갖고 있지만, 나이와 경력 탓에 정치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다. 이들은 별도의 직업 없이 여의도를 오가되, 전당대회나 중앙위원회, 전국위원회 등을 통해 당무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서 보람을 찾는다. 정치 낭인이라기보다 ‘정치 예비군’에 가깝다.
말 그대로 ‘정치 낭인’도 있다. 전직 당직자 가운데 나이가 많아 설 곳을 잃었거나 이런저런 선거에서 ‘주군’을 잃어 딱히 갈 곳이 없는 부류다. 과거 정당과 정치인이 당직자나 보좌관을 채용할 때 잣대로 삼았던 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충성심이었다. 우직함만으로 버텨왔던 이들이 지긋한 나이에 ‘일자리’를 잃으면,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일없이 정치판을 기웃거리다 보면, 정치 낭인을 넘어 ‘정치 브로커’의 길로 빠지기 쉽다. ‘한나라당 ~부위원장’ ‘민주당 ~위원’ 등의 명함을 얻은 뒤, 지역에서 이를 미끼로 ‘장사’하는 인간형이다. 정치인과의 친분을 과시해 지역 민원을 해결해줄 것처럼 속여 접대를 받거나 ‘용돈’을 받아 쓴다면, 그는 ‘정치 브로커’의 전형이다.
정치 지망생이 됐든, 정치 낭인이 됐든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여의도에서 호출이 오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이다. 3월 말, 여의도에서 맞닥뜨린 ○정남씨 목소리는 정치의 계절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래요. 우리 조만간 다시 봅시다. 한나라당 ○정남, 내 이름 잊어버리지 말고.”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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