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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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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06-01-21 00:00 수정 2020-05-03 04:24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생활이 누수다. 보수, 수리, 수선할 일들만 생긴다. 빨래 건조대의 위로 올리는 줄이 끊어졌다. 줄 하나는 남아 있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떨어지지는 않기에 그냥 둔다. 그 아래를 지날 때는 항상 고개를 숙여야 한다(2005년 봄). 텔레비전을 두는 장식장의 장식 가로대가 떨어졌다.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툭툭 떨어져내린다. 그때마다 살짝 끼워둔다(2005년 봄). 그 옆의 서랍 장식 가로대도 떨어지기 시작했다(2005년 봄 끝나갈 무렵). 개수대의 쓰레기 거르는 플라스틱 통이 썩을 지경이다. 통을 씻으면서 입덧 비슷한 걸 몇 번 한 뒤 새로 사왔다. 맞지 않는다. 그대로 두기로 한다(2005년 여름). 노트북이 책 쌓아둔 곳에서 떨어진 뒤 부팅이 되지 않는다. 전원이 들어가면 아무런 화면도 뜨지 않고 팬 도는 소리만 나다가 그친다. 가방 속에 넣는다. 컴퓨터가 필요할 때는 회사 걸 집에 가지고 온다(2005년 겨울).
얼마 전에는 그냥 둘 수 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추위에 얼었는지 세탁기 호스 물이 새기 시작했다. 나사를 다시 조여볼까 하고 드라이버를 찾았지만 집에는 일명 ‘컴퓨터 드라이버’만 있다. 그 작은 드라이버로 제대로 조여질 리가 만무다. 세탁은 해야 한다. 대야에 물을 받아 부으며 세탁을 마쳤다. 3번 돌리던 헹굼을 2번으로 만다. 일주일이 간다. 세탁기에 빨래는 쌓인다. 다시 토요일이다. 다시 빨래를 해야 된다. 오후에 마트에 가서 드라이버를 산다. 일요일 아침 호스를 빼고 나사를 풀고 밑에서 힘껏 받치며 나사 네 개를 조여 맞추고 다시 호스를 꽂아 물을 틀어본다. 여전히 물은 샌다. 호스를 바꿔야 하나. 대리점에 간다. 바깥의 커다란 스피커로 ‘10가지 고객 약속’ 목소리가 방방거린다. 문 앞에 서니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문을 안으로 당겨준다. “세탁기 호스 있나요?” “그건 서비스센터 가셔야 하는데요…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하지 않습니다.” “세탁기 호스 끼워주러 오기도 하나요?” “그건 저희가 모르죠. 서비스센터와 저희는 전혀 별개의….” 사지 않을 사람으로 확인되자 직원은 귀찮다 모드로 바뀌었다. 집에 온다. 물을 받는다. 세탁조에 물을 붓는다. 세탁기를 돌린다.
블록마다 한 집 건너 하나씩 휴대전화 매장이 있지만 막상 휴대전화를 수리하려면 물어물어서 어디 구석진 곳의 서비스센터를 찾아야 한다. 마트마다 세탁기를 팔고 번쩍거리는 전자제품 매장이 있지만 수리는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만 이루어진다. 보수할 거리는 늘어가는데 보수가 개보수다.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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