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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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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 음악

등록 2005-11-25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얼마 전 인터넷 메신저의 한 친구에게 물었다. “아, 정말. 소음 음악, 그게 뭘까요. 못 듣겠어요.” 이 순간 머리 속에선 ‘프리재즈 연주가 강태환의 색소폰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걸 모르는 바 아니나 그 음악이 피부로 이해되진 않았다’는 예전 기억이 동시상영 중이었다. 실험, 전위, 아방가르드 같은 개념어들은 문자 자체로는 예쁘지만 그게 기계의 소음을 모아 들려주는 현대 노이즈 음악 같은 실체를 보이면 다소 당황스러운 대상물이 된다. 친구는 말했다. “머, 아름다워야 한다는 당위성이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 맞다, 그렇지. 나도 아는데. 음악철학 9단인 그이가 소음 음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내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한마디 해준 셈이다. 내 딴엔 적과 아군과 이해 못할 자들이 서로 불편해하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문화 농장을 경작하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전위 예술가들까지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 백남준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잔 게 1999년이다. 머스 커닝햄의 무용을 10분의 1 이해한 게 2004년의 일이다. 이해하지는 못하나 그 존재성을 받아들이는 일. ‘관용’이란 쉬운 게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음악은 맑고 밝아야 되는 줄 알았다. 피아노 소품곡 정도면 충분히 아름다웠다. 전자 기타에 심취한 언니, 오빠들은 내게 ‘소음 남녀’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20대 청년은 ‘야, 시끄러워’라는 클래식한 대사의 주권을 옆 사람에게 넘기고, 휴식이 필요할 때면 대화가 제1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시끄러운 술집에 가서 스피커 터지듯이 빵빵하게 나오는 록 사운드를 들으며 수세미로 빡빡 냄비 닦듯 눌어붙은 우울들을 씻어내곤 했다. 우린 아이돌 스타 디캐프리오가 주인공이라 찜찜하긴 했지만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 삽입된 라디오헤드 3집 <오케이 컴퓨터>의 <엑시트 뮤직>(Exit music)에 “자살하고 싶어지는 음악”이란 유치엄숙의 최상급 10자평을 헌사했다. 영국 브리스틀에서 온 트립합 정도만 보태지면 해저 2만리를 유영하는 건 껌이었다. 그러니까, 음악은 꽃 문양일 필요가 없다. 시끄럽고 투박하고 신경질적이고 암울하고 자기분열적이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예술도 정치인이나 미디어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속삭이며 멋내기에 정신이 팔리면 골치 아픈 허영심에 젖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예술이 표면적인 아름다움만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린 바다에 도달해 신나게 헤엄을 칠 수 있다.
이런 견해라 미술도 인상파 이후의 현대미술이 좋다. 영주님의 초상을 우아하게, 천지창조라는 관념적 정황을 숭고하게 붓칠한 화가들은 단체와 개인에 종속돼 감정의 대리인이 되어야 했다. 그보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유치하든 난해하든 개인주의자들의 감정이 묻어난 작품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복합적이고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관용. 이것이 이 글의 주제. 다만 문제는, 이런 식으로 ‘아름다움의 신화’를 극복하고자 애쓰다 보면 자연스레 예술들이 서양사 계통으로 정리되고 만다는 거다. 이 무슨 난감한 현상이람. 마쓰리에 유카타 입고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머리 노란 도쿄 젊은이들의 자국 문화 소화력을 좀더 탐구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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