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8년 어느 날 야구 경기를 보다가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치는 것을 보고 문득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폴 오스터 식으로 말하자면 우연과 우연을 거듭해 우주만물이 이상스럽게 동화하는 순간, 그 시간을 겪고 나면 그 이후가 그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순간, 그러한 ‘결정적 순간’이 있다. 나같이 볼품없는 사람에게는 결정적 순간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는 순간이나 사춘기 때 커피물을 끓이다 언니의 이야기를 엿들었던 순간 등으로 별게 없다. 하지만 대단한 일에는 대단한 일다운 결정적 순간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 순간에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를 외쳤다.
〈PD수첩〉의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주는 데 걸린 시간은 오지 않을 것처럼 길었다. 문화방송은 애초부터 황우석 관련 취재를 하다가 알게 된 ‘난자 제공 의혹’만을 방영하고 본편에 해당하는 ‘논문 진위 논란’은 방영하지 않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PD수첩〉은 돌팔매를 맞았지만 그 시간은 〈PD수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국인들이 단련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결국 〈PD수첩〉의 이름으로는 아니지만 특집으로 방송되었다. 방영 여부와 관계없이 나는 다음 순간에 한학수 PD는 진심을 보상받았으리라 생각한다. ‘〈PD수첩〉은 왜 재검증을 요구했는가’에서 한 PD는 황 교수에게 “올해 11개 만들어진 환자 유래 줄기세포가 배반포 단계에서 줄기세포가 확립된 건 언제인지 혹시 기억나십니까”라고 질문한다. 이 말에 황 교수는 당황한 순간에도 여유로운 특유의 영웅(또는 의뭉)스런 목소리로 “한 선생님, 다음부터는 철두철미하게 할게요. 이젠 이 세상이 이렇게 무섭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젠 할게요”라는 말한다. 바로 그 순간 한 PD는 “유레카”를 불렀을 것이다.
정당했다면 황 교수의 2005년 논문에도 유레카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지루한 실험 과정, 아침저녁으로 눈을 부라리고 티끌만큼씩 자라는 세포를 보는 숨막히게 고단한 과정, 그 과정을 견디게 해주는 건 작은 결정적인 순간일 것이다. 줄기세포가 확립되고 그것이 테라토마를 거치며 줄기세포로 증명되는 결정적인 순간. 체세포와 줄기세포의 피크가 동일하다는 DNA 핑거프린팅은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이리라. DNA 검사를 맡긴 뒤 수술 대기실의 환자 가족처럼 초조하게 기다렸을 것이고, 분석실에서 온 봉투를 뜯는 손은 떨렸을 것이다. <사이언스>에 논문이 실리고 세계적 권위자가 덕담을 하고 대통령이 초대하고 국민들이 열광한 것도 이 순간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황 교수가 내놓은 것은 위대한 논문이었지만 그 안에 위대한 결정적 순간은 없었다. 황 교수는 학자를 이끄는 원초적 동력인 ‘결정적 순간’의 환희를 포기한 것이다. 황 교수에게 연민이 느껴진다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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