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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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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팠니?

등록 2005-12-22 00:00 수정 2020-05-03 04:24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클릭을 잘못해서 인터넷 한겨레 ‘형경과 미라에게’ Q&A 게시판에 들어갔다. 어제 해야 할 일도 내일로 미룬 김에 아예 주저앉았다. 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엄숙하게 게시판의 글들을 천천히, 모두 읽어본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 특이하다.
“(아내와) 오늘도 말하지 않은 채 3일이 지나갑니다. 아내도 이젠 말하지 않기 시작합니다.” “(남친이) 어제는 미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와 아버지 사이에 벌어진 멍한 이 거리를 어떻게 좁혀갈 수 있을까요?” “가족들이 생각하는 나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그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 두려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까지처럼 그녀에게 미쳐서, 그녀는 나에게 미쳐서 살아야 할까요?” “지옥까지 가봐야 이혼을 한다고 하더니 그것을 절실히 경험했습니다.” “바람기라고 하기엔… 저도 제 감정에 너무 빠져버립니다.” “내가 누구인지, 뭘 하는 사람인지….” “내 안의 분노로 괴롭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2005년, 국보법이든 수도 이전이든 사안이 불거져나올 때마다 각기 다른 분노가 나라를 뒤덮던 한 해. 사람들은 소리 없이 많이 아팠다. 매체에선 쿨한 사랑법이 득세하고 웰빙이 유행하고 여권신장의 목소리가 늘어나는데, 현실은 여전히 변함없고 미로처럼 얽혀가기만 한다. 개인은 자신의 존재가 버겁다. “누군가 내게 해답을 제시해줘!”라고 외치는데, 그런 소리는 분노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올해 심리학 서적이 날개 돋친 듯 팔려갔다. 가히 심리학 전성시대다. 설득과 유혹의 심리학에서부터 이별하는 방법 등 종류도 다양하다. 나는 이런 현상이 ‘참을 수 없는 개인의 무거움’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책들의 주요 기능은 ‘확인’이 아닐까. 우리는 이미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의 뻔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그 사람을 잊어야 하고 가족과 대화해야 하고 나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다만 우리는 누군가가 확인해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올해 나온 심리학 책 중에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빅터 프랭클 지음, 오승훈 옮김, 청아출판사 펴냄)도 있다. 197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발간된 이 책은 1970년대 미국과 유럽의 집단신경증이 ‘의미상실감’이라고 진단한다. 나는 그런 신경증이 이미 우리에게도 발병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한 사회의 개인이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다. 자신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나가자는 ‘로고테라피’ 이론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다만 우리 앞에 던져진 이 삶의 무거움,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통을 회피해선 안 된다. 그렇게 무사히 2005년을 넘긴 것처럼, 2006년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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