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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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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발라드

등록 2006-02-17 00:00 수정 2020-05-03 04:24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점점 겨울이 견디기 힘들어진다. 토요일 오후 늦은 점심을 먹다가 공개 음악방송을 보았다. 등장하는 가수마다 조용히 읊조리다가 핏발 세워 절규한다. 떠나간 연인을 못 잊어서다. 화면 아래로는 가사가 나온다. 죽도록, 너는 내 인생 하나의 사랑, 가슴 아파… 등의 가사가 보인다. 가슴이 절절해야 하는데 픽, 웃음이 나온다. 다음날 웬일로 일찍 잠이 깨서 텔레비전을 켰다. 그러곤 잠을 맞이하는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화면으로는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음악 케이블 채널이었다. 화면으로는 흰옷 입은 여자와 깡패가 등장하는 기(起), 아주 짧은 즐거웠던 때를 상징하는 키스신의 승(承), 목숨을 건 혈투의 전(轉), 비극적인 결(結)이 반복됐다. 이 한결같이 목숨 건 연약한 사랑은 병적이고 도착적이다. 아, 그렇다. 지난해에 그랬듯이 올겨울도 발라드가 정복했다. 그리고 겨울을 점점 못 견디겠다.

1월 초에 나온 한경일의 <사는 동안 사랑은 없어도>는 “죽을 만큼 사랑했는데 사는 동안 사랑할 텐데/ 사랑만 아는 나는 이젠 멈출 수가 없는데/ 사람은 날 떠나도 사랑은 나를 못 떠나/ 매일 슬프게 살면 되는 거잖아”라고 노래한다. 지난해 11월에 나온 테이의 <사랑은 하나다>도 비슷하다. “목숨이 하나듯 사는 동안 내겐 그 사람은 사랑은 하나다/ 허나 슬프게 미안하게도 조금씩 난 사랑을 나눠 쓰는 법을 모르니/ 사랑아 그냥 있어라 그래야 숨쉴 것 같다.” 지난해 10월에 나온 가비엔제이(Gavy NJ)의 <그래도 살아가겠지>도 제목에서부터 뻔하다. “살아볼게 힘들어도 나 그래볼게/ 그리워도 두 번 다신 사랑할 수 없다면.” ‘사랑을 나눠 쓰는 법’이라는 기이한 발상에서도 엿볼 수 있듯 가사는 단순한 감정을 복잡하게 피력하려고 노력한다. 1월 말 나온 김형중 3집의 <가슴이 소리쳐서>는 “가슴이 소리쳐서 세상 말 다 지워서/ 그대 이름만/ 그대 얹은 숨만 늘어가는데… 억지로 구겨 속 깊이 넣어도 그리움은 태연하게 머릴 내밀어.” 1월 말 나온 버블 시스터즈 2집의 <사랑먼지>는 “손대면 난 눈물이 흘러서 바라볼 때면 맘에 멍이 들어서/ 이젠 가슴 시린 추억으로 묻어두려/ 그대 흔적을 난 치우죠.” 그렇다면 이 먼지를 치우는 덴 진공청소기가 좋을까요, 스팀청소기가 좋을까요?

이러니 컴백한 가수 중 이승철만이 유일하게 성공한 것도 이해가 간다. 80년대 그의 애절함은 독보적이었는데 지금에서는 직속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고만고만해졌다. 뽕짝이 유치해지니까 ‘유치 뽕짝’이라고 그랬는데, 이 말은 이제 ‘유치 발라드’로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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