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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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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을 빗나간 증오

등록 2006-01-12 00:00 수정 2020-05-03 04:24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모든 증오에는 이유가 있다. 물론 파시스트를 싫어하는 것과 고추장을 싫어하는 건 다르다. 그러나 온갖 사소한 것들에 대한 증오에도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표면 아래에 은폐돼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왜 이 교활한 감정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걸까.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샤이닝>의 한 장면. 숨막힐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빌어먹을 첩첩산중 리조트에서 아내와 아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이한 사고들이 터진다. 남편은 산에서 내려갈 것을 종용하는 아내의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가면 남편을 기다리는 것은 실직과 비웃음이다. 산은 가부장의 마지막 요새였다. 리조트 한가운데에 하산의 유일한 수단인 낡은 트럭이 서 있다. 그는 갑자기 트럭의 흉한 모양새와 털털거리는 소리와 먼지 쌓인 트렁크 덮개가 싫어진다. “흉물스러운 놈.” 그는 낡은 닷지트럭이 못 견디게 싫다.
어빙 스톤의 <소설 프로이트>의 한 장면. 프로이트의 은사 마이네르트는 “불합리한 이론”이라는 이유로 프로이트의 학설에 저주를 퍼부었다. 세상을 뜨는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신이 남성 히스테리 환자였고 클로로포름 냄새를 맡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정신의학자답게 죽기 직전에 프로이트에 대한 적개심의 이유를 자기 내부에서 찾아냈다.
어느 선배가 들려준 일화. 버스 앞에서 무엄하게도 승용차가 아슬아슬한 끼어들기를 감행했다. 새파랗게 젊은 승용차 주인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인 나이 지긋한 버스 기사님은 자리에 앉더니 큰소리로 말한다. “노무현이 대통령 돼서 저런 놈들이 활개치지!” 나도 술자리에서 대통령을 질겅질겅 씹어댔지만, 승용차의 버르장머리 없는 짓은 대통령 탓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평생 충혈된 얼굴로 운전대를 잡았을 한 사내의 과녁을 비켜간 분노다.
이런 감정의 과정을 심리학에서 ‘투사라 부르는지 어쩌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증오의 원인이 합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전교조가 우리 사회와 아이들을 전부 새빨갛게 물들이는 ‘악의 화신’이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B급 영화의 판타지다. 건국 이래 계속된 권력의 ‘입맛대로 인사’ 관행은 역겹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합법적인 권한을 행사해 총리도 아닌 보건복지부 장관을 내정한 사실로 치를 떠는 건 ‘오버’다. 머릴 쥐어뜯으며 생각해봐도 그렇다.
과장된 증오가 나라를 둥둥 떠다닌다. 우리는 종종 증오에 대해 실재와 전혀 상관없는 고상한 이유를 들이댄다(국가와 민족의 장래?). 그리고 스스로 정말로 그렇다고 믿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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