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동민/ 충남대 교수 · 경제학
물론 내가 연구자로서의 역량이나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과연 사회과학에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은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회의에 휩싸일 때가 많다. 다른 분야는 차치하더라도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진리’나 ‘법칙’들은 세상을 설명하는 데 때로는 너무나도 무력할 뿐만 아니라, 예컨대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라는 중학교 과학 시간의 초보적 가르침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경제학의 명제들은 잘 통제된 실험실에서 비커에 물을 넣고 끓여보면 증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 눈앞에 주어진 현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분석한다고 해서 쉽사리 결판이 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과학철학에서 모든 이론 체계는 그 안에 결코 입증되거나 반증되지 않는, 따라서 결코 포기되거나 수정되지 않는 중핵(hard core)을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실의 변화는 그저 예외적인 사건으로만 이해되거나 중핵을 둘러싼 여러 가지 보호장치들에만 다소 변화를 가져올 뿐 중핵 자체는 결코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정형화 ‘좌파적 경제정책의 실패’
최근의 ‘경제위기’에 대한 몇 가지 해석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상이한 ‘현실들’에 기초하고 있다. 사상 최대의 증가율을 보인 수출실적 등의 지표를 들어 경제위기가 아님을 줄기차게 부인해오던 정부도 결국은 재정지출 확대에다 소득세 감면 등의 강력한 약물에 의존하는 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위기’를 말하기에 충분할 만큼 경제지표가 악화됐는지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소비 부진에 대해서도 부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의 한편에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기 때문이라거나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는 저소득 계층의 현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석들과 상관없이 ‘위기’의 원인에 관한 정형화된 한 가지 해석은 이런 것이다. 포퓰리즘적 성향을 지닌 대통령과 그 주변의 운동권 출신인 젊은 실세들이 취하는 ‘좌파적’ 정책의 결과, 기업은 돈이 있어도 투자를 하지 않고 공장을 지어도 외국에 지으며, 부자들은 불안에 떨며 돈을 쓰지 않고, 노동조합의 집단이기주의적인 요구 때문에 일자리는 더욱 부족해지고, 결국 우리는 “10년 뒤에 먹고살 것이 없어지는” 남미 포퓰리즘 정권의 뒤를 밟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중핵 역할을 하는 것은 집권세력이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진보적 학자 출신의 장관이 한술 더 떠 설치고 다녀도 그것은 그저 일시적 위장이거나 일관성 없는 정치적 몸짓에 지나지 않으며, 개발독재 시절부터의 정통 관료 출신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그저 실권 없는 바지저고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뿐이다. 이러한 해석 앞에서 현 정권이 취한 좌파적 경제정책의 실례를 지적해보라는 질문도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현 정권은 좌파이며 좌파가 하는 것이 좌파적 경제정책이라는 동어반복 이외에는 준비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단 하나 좌파가 손을 털고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것밖에 없다. 역시 이러한 해석의 최고봉은 실컷 좌파 정책을 써보도록 바지저고리 장관들은 자리 욕심 내지 말고 내려오라는 김대중 주필의 정곡을 찌르는(!) 주장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나 과거청산 문제 등이 집권세력의 정치적 총공세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경제 문제에서 지금의 시기는 보수우파적인 이데올로기의 총공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검증도 필요 없는 정형화된 해석으로 무장한 경제학자, 기업가 단체, 신문기자 등이 앞다투어 주문을 외워대는 형국이다. 내가 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마치 박정희 경제성장 신화가 정착됐던 것처럼, ‘좌파적 정책의 실패’라는 신화가 자리잡아나가는 과정을 목도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실은 과연 존재하는가 따위의 철학적 질문이 치열한 현실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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