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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120년…한규설의 불끈 쥔 두 주먹을 아시나요

11월17일 ‘을사늑약’ 120년 앞두고 찾은 중명전… 오욕과 저항의 역사적 현장
등록 2025-11-13 21:42 수정 2025-11-17 11:35
1905년 일제가 무력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 제1전시실에서 관람객이 당시 상황을 재현한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1905년 일제가 무력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 제1전시실에서 관람객이 당시 상황을 재현한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뜻의 중명전의 본래 이름은 수옥현이다.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전각이다. 경운궁(현재 덕수궁)에 딸린 서양식 건물로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나 주요 전각이 소실되면서,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편전과 침전으로 썼다. 그리고 이곳은 1905년 11월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아픔의 현장이기도 하다. 중명전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삼면에 베란다가 있다. 바깥벽은 회색과 붉은색 벽돌이 섞였고, 1·2층 바깥 난간은 회색으로 둘렀다. 2009년 복원 공사를 한 뒤 2010년 상설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을사늑약 120주년을 닷새 앞둔 2025년 11월12일, 서울 중구 정동길 41-11. 국립정동극장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면 중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덕수궁 돌담길과 떨어져 있어 찻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늦가을 햇살 아래 붉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붉은빛을 띤 건물이 고요히 서 있다. 만추를 즐기려는 사람으로 가득한 정동길과 달리 이곳을 찾는 이는 드물다. 궁 관계자는 “오전에는 관람객이 많지 않고, 점심 무렵 직장인과 시민들이 찾는다”고 전했다.

중명전의 ‘명’(眀) 자가 ‘일’(日)이 아닌 ‘목’(目)으로 쓰인 편액 아래 현관문을 밀었다. 1층 바닥은 건축 당시의 타일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로 덮여 있고, 왼편 제2전시실에는 을사늑약 체결 장면이 재현돼 있다. 가운데 앉은 이토 히로부미를 바라보며 왼쪽으로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이 앉아 있고, 오른쪽으로 박제순, 두 주먹을 불끈 쥔 한규설과 민영기, 그리고 이하영이 앉아 있다. 책상 위에는 늑약문 등이 놓여 있고, 정면 스크린에서는 당시의 긴박한 순간을 담은 영상이 무겁게 흘러나온다. ‘고종실록’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추정, 재현해놨다. 전시실을 둘러본 윤영숙(56)씨는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1월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지정했다.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희생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다. 정부는 1997년 이를 법정기념일인 ‘순국선열의 날’로 제정했다.

“역사를 기억해야 강해진다.” 최근 중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난징대학살 소재 영화 ‘난징사진관’의 한 대사다. 잊지 말아야 할 오욕과 저항의 역사적 현장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끝까지 조약 동의를 거부한 한규설 참정대신(왼쪽) 등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결국 그는 중명전 마루방에 감금됐다.

끝까지 조약 동의를 거부한 한규설 참정대신(왼쪽) 등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결국 그는 중명전 마루방에 감금됐다.


 

제3전시실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에 놓인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복제품)와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담긴 ‘불원복 태극기’.

제3전시실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에 놓인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복제품)와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담긴 ‘불원복 태극기’.


 

제4전시실 ‘대한제국의 특사들'에 전시된 위임장 모습.

제4전시실 ‘대한제국의 특사들'에 전시된 위임장 모습.


 

회색과 붉은색 벽돌이 섞인 덕수궁 중명전 들머리. 편액에 ‘명’(眀) 자가 ‘일’(日)이 아닌 ‘목’(目)으로 쓰였다.

회색과 붉은색 벽돌이 섞인 덕수궁 중명전 들머리. 편액에 ‘명’(眀) 자가 ‘일’(日)이 아닌 ‘목’(目)으로 쓰였다.


 

오욕과 저항의 역사를 품은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 1905년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다.

오욕과 저항의 역사를 품은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 1905년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다.


 

사진·글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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