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 김일성 군대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한국 정부와 군은 사흘 만인 6월28일 새벽 서울(현재의 서울 강북)을 내주고 한강 남쪽으로 총퇴각했다. 국군은 이때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를 스스로 폭파해 북한군이 남쪽으로 전진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춘천 전투에서의 실패로 6월30일까지 서울에 머물렀고, 남쪽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그동안 한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1950년 6월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미군은 다음날인 6월29일부터 서울에 대한 항공기 폭격을 시작했다. 목적은 한강 남쪽(현 노량진 일대)에서 북한군과 대치 중이던 한국군의 사기를 높여주고, 한강 북쪽 기슭에 주둔 중인 북한군의 병력과 보급품을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최초의 폭격 목표물은 서울역이었다. 서울역에 대한 폭격은 비(B)-29 4대에 의해 북동쪽에서 남동쪽으로 비스듬하게 이뤄졌다. 서울역의 북한군과 보급품, 열차 등을 정밀하게 폭격하고, 주변 지역에 피해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서울에 대한 가장 대규모의, 가장 파괴적인 폭격은 7월16일 용산역과 공작창(열차 만들고 고치는 곳), 조차장(열차 붙이고 떼는 곳)에 대해 이뤄졌다. 이른바 ‘용산 대폭격’이었다. 이날 폭격은 그 이전 서울역과 한강 북쪽 기슭에 대한 폭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날 폭격은 용산역의 북한군이나 보급품, 열차가 아니라 용산역과 공작창, 조차장 전체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용산역 공작창은 1년에 25대의 기관차와 2500량의 열차를 만들 수 있는 한국 최대의 철도 제조 시설이었다. 북한군과 보급품의 수송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설이었다.
7월16일 미국 극동공군 소속 B-29 폭격기 47대가 1504발의 폭탄을 용산역과 공작창, 조차장에 쏟아부었다. 말 그대로 ‘융단폭격’이었다. 그 뒤에도 미군은 3차례 더 용산역 일대를 폭격해 모든 시설과 장비를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이 연속적인 대규모 폭격으로 용산역 일대는 쑥대밭이 됐고, 주변 지역 주민들까지 심각한 피해를 봤다. 6·25전쟁 초기인 1950년 6월25일~9월28일 석 달 동안 서울에서 1만7127명이 사망했는데, 당시 서울의 9개 구 가운데 용산구의 사망자가 2706명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항공기 폭격에 의한 사망자는 9개 구에서 4250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용산구가 1587명으로 37.3%에 이르렀다. 전쟁 초기 용산구의 전체 사망자와 항공기 폭격 사망자가 가장 많은 이유는 용산역 일대에 대한 대규모 폭격 때문이었다.
미군이 용산역과 함께 핵심 수송 시설로 판단한 것은 한강의 다리였다. 미군은 서울역에 첫 폭격을 가한 6월29일 서울 한강의 모든 다리를 파괴하라고 극동공군에 지시했다. 그 뒤 7월1일~8월17일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 북한군의 임시교에 8차례 걸쳐 항공기 폭격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 임시교는 모두 ‘불능’ 상태가 됐다. 이 지속적인 대규모 폭격으로 한강 다리 주변은 폭탄 자국으로 뒤덮였다.
전쟁은 국가의 목표를 이루는 방법으로는 너무나 위험하지만, 전쟁으로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그 결정에 아무런 권한이 없었던 하급 장교와 병사, 민간인은 반드시 희생된다. 시민들은 국가의 목표가 전쟁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지도자에게 이렇게 요구해야 한다. “전쟁을 결정한 당신이 최전선에 서서 싸워라.” 전쟁을 결정한 사람이 최전선에 서서 싸워야 한다면 전쟁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에 의한 서울 폭격의 목적과 양상, 2008
*더 많은 관련 사진을 보려면 용산학연구센터 블로그(blog.naver.com/yongsanstudies)에서 ‘내셔널 아카이브 소장 항공사진’을 클릭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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