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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스퀘어

[포토스퀘어] 남김없이 살다 떠난 백기완

‘노나메기’ 세상 꿈꾸며 거리를 지켰던 영원한 ‘민중의 벗’을 기리며

제1351호
등록 : 2021-02-20 01:20 수정 : 2021-02-2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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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이 1992년 4월24일 명지대에서 열린 ‘강경대 열사 1주기 및 5월 투쟁 선포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사진은 1992년 민중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선생의 홍보물에 사용됐다. 사진을 찍은 민족사진연구회 회원은 선생이 이 사진을 소장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24년이 지난 2016년 사진을 선물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에서 영정사진으로 쓰였다.  *‘노나메기’란,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뜻한다.

백기완 선생은 거리에서 또 광장에서 늘 일렬(첫째 줄)을 지켰다. 폭압적 군사정권과 맞서 싸울 때 경찰의 최루가스와 물대포 등 강경진압 앞에서도 시위대의 방패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선생은 평생 ‘재야인사’였다. 1960~80년대 군사정권이 내세운 꼭두각시 정당들로 민주주의가 빈사 상태에 빠졌을 때 그는 시민사회 활동가이자 큰 어른으로 제도권 밖에서 싸웠다. 그 대가로 투옥과 고문이 반복됐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나섰을 때도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닌 민중후보였다.

선생은 또 사회적 약자가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벌일 때 가장 앞서 달려가 손을 잡아주었다. 김소연, 유흥희 등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복직 농성, 세월호 유족 진상규명 만민공동회 등에도 그는 어김없이 백발의 노구를 드러냈다. 덕분에 거리와 광장을 기록해온 사진가·사진기자들은 백발의 사자후를 프레임에 담을 수 있었다. 그의 따뜻한 손길과 맑은 미소, 뜨거운 눈물이 사진으로 남았다. 영면의 길을 떠난 선생을 기리며, 몇 순간을 한자리에 모아본다.

‘자진녹화대’를 꾸려 나무심기운동을 벌인 이십 대의 백기완 선생(오른쪽)이 1957년 강원도 양양에서 나무를 심고 있다.

1974년 2월 유신헌법 철폐 백만 명 서명운동을 벌여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된 백기완 선생(앞줄 왼쪽)이 장준하 선생(오른쪽)과 함께 군사법정에서 재판받고 있다.

1985년 광주학살 5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벌인 백 선생 등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지도부가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의 지지 발언을 듣고 있다. 맨 오른쪽은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 그 옆은 문익환 목사.

1990년 건국대에서 열린 민중대회에 참석한 백기완 선생(가운데). 오른쪽은 계훈제 민통련 상임고문.

2000년 북쪽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아 평양을 방문한 선생이 57년 만에 누나 백인숙씨를 만나 끌어안고 있다.

2008년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7일째 단식농성을 벌이던 금속노조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이 폐에 물이 차 응급조치를 받으러 내려오자 백기완 선생이 손을 잡고 위로하고 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158일째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응원하러 희망버스를 타고 온 백기완 선생이 조선소 담을 넘어 들어가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촉구하고 있다. 

2017년 조계종의 퇴행을 비판하다 승적을 박탈당한 명진 스님 단식농성장을 찾은 백 선생이 스님을 무릎에 누인 채 다독이고 있다.

사진 박용수 사진가, 박승화·이정우·김명진 기자,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글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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