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웃는다. 입이 달싹인다. 어깨는 들썩인다. 발꿈치가 들려 몸이 솟구친다. 서로에 휩싸여 앞으로 나아간다. 드문드문 외국인도 섞였다. 거리 축제인가, 유명 페스티벌일까.
2024년 마지막 토요일인 12월28일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4차 범시민대행진’이 펼쳐진 서울 한복판 광화문 거리 모습이다. 심각하다 못해 처절한 우리 공동체에서 절체절명의 시간을 버티고 있는 구성원들의 표정이라고 하기엔 여유를 넘어 흥이 넘친다.
광화문 동쪽 동십자각 앞에서 사직로를 따라 사직공원 주변까지 뻗어나간 인파는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 사이에 자리한 경복궁을 관람하러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를 살핀다. 가족 단위 참석자들에 어린이부터 중장년까지 어우러진 구성에 이내 경계심을 거두고 다가온다. 휴대전화를 꺼내 인파를 사진에 담고, 뒤로 돌아 자신의 얼굴을 넣어 인증샷을 찍는다.
“숨가쁘게 살아가는 순간 속에도/ 우린 서로 이렇게 아쉬워하는 걸/ 아직 내게 남아있는 많은 날들을/ 그대와 둘이서 나누고 싶어요”
‘마왕’ 신해철의 ‘그대에게’가 울려 퍼지자 일부 관광객들은 노래가 들려오는 무대 쪽을 향한다. 걷다보면 커피차를 만난다.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오다 남태령에서 경찰에 가로막힌 ‘전봉준투쟁단’이 함께 밤을 지새워 길을 열어준 청년·시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5천 잔의 커피와 차를 나눠준다. 농민답게 유자차, 자몽차, 매실차, 코코아 등 메뉴도 다양하다. 무지개떡 1만 개도 손에 쥐여준다.
동십자각 쪽으로 좀더 가면 시민사회 천막이 늘어섰다. 천막별로 어묵탕, 파전, 핫팩을 나눈다. 추위가 낯선 관광객에겐 이런 횡재가 없다. 영하 7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서울 구경에 나선 길, 따뜻한 차에 핫팩으로 몸을 데우니 이들과 함께하고픈 마음이 절로 든다.
뜻 모를 한국말을 들으며 무대 위를 본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부끄러운 듯 나직하게 말하는 이도 있고, 쩌렁쩌렁 사자후를 토해내는 이도 있다. 울음이 배어 떨리는 소리가 귀에 닿을 땐 듣는 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양한 차림새의 한복을 입은 이들이 무대에 올랐다.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같은 앞다리, 동아같은 뒷발로양 귀 찌어지고”
댄서들이 무대를 내려와 시민들 속을 뛰어다니며 춤춘다. 한판 난장이다. 이를 끝으로 모두 일어선다. 이제 ‘범시민대행진’에 나설 순간이다. 10차선 사직로를 가득 채운 채 헌법재판소를 향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출발이 조심스럽다. 일정 인원이 빠져나가길 기다려 행진을 이어간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마 눈 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소녀시대의 ‘다만세’(다시 만난 세계)가 걸음에 힘을 보탠다. 끝없이 이어진 이날의 행진은 헌재 못 미쳐 안국동 네거리에서 종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명동에 이르러 다음을 기약하며 흩어졌다.
불과 25일 전인 12월3일 충격·공포·분노·불안으로 불면의 밤을 보냈던 이들이다. 실시간으로 계엄령 선포를 접하고 겨울밤 휴식을 팽개치고 국회로 달려간 이들이다. 농민들의 도움 요청에 인적 드문 남태령 고갯길에서 저체온증을 마다않고 밤을 지새운 이들이다.
무엇이 이들에게 이방인의 눈에 신기할 정도의 낙관을 심어주었나. 축제와 다름없는 데모를 할 여유와 배짱, 에너지에 불을 지폈나.
그 전부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옆에 앉은 사람이 건네는 위안, 또 그 옆에 선 이가 주는 힘이다. 굳이 국적이 이들을 가르지 않는다. 그래서 ‘케이(K)-데모’라 구별하지 않는다. 그저 불의에 맞서 보편의 공동체를 지켜내려는 ‘데모’다.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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