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자카르타한국학교(JIKS) 11학년(고2) 학생이 교지 <jiks>에 쓴 글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도 힘든 일들이 많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강도가 들었던 일, 자주 무단결근해서 해고당한 기사가 우리 가족을 죽여버리겠다며 협박했을 때라든가, 비자 문제로 잠시 말레이시아로 떠났는데 인도네시아 대사관 컴퓨터가 잠긴 탓에 2주일 넘도록 하루하루 버텨가며 부랑자가 될 뻔하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일 등이다. (중략) 그 많은 일들이 있은 후 문단속을 잘하게 되었고 협박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으며 거지 같았던 여행을 통해 가난한 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꼽은 첫 번째 지옥은 비자다.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에서 비자를 얻기 가장 힘든 나라다. 비자 기간이 짧고 신청과 갱신에 만만치 않은 비용과 시간이 든다. 게다가 이민국의 비자 규정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비자 대행사 담당자도 새 규정을 모를 때가 많다. 1년짜리 취업비자를 얻기 위해 나는 인도네시아 정부에 내는 미화 1200달러 외에 단계별로 수수료 명목의 돈을 내야 했다.
두 번째 지옥은 교통이다. 자카르타엔 중심가를 빼놓고 인도, 건널목, 교통 신호등이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교통정체가 심한 도시라 이런 고육지책을 쓰는 것이다. 그래도 20분 거리를 2시간씩 가는 게 보통이며 시도 때도 이유도 없이 막힌다. 특히 비 오는 날 차 안에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에 습기가 찬다.
세 번째 지옥은 의료다. 인도네시아에는 아직 공공 의료보험이 정착돼 있지 않다. 서민들은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 주로 외국인이나 상류층이 가는 자카르타 대형 종합병원은 병원비가 어마어마하다. 지난해 막내가 홍역에 걸려 대형 병원에 3일 입원시켰는데 병원비가 한화로 250만원 정도였다. 링거를 고정하는 데 쓴 3M 테이프 값까지 청구서에 적혀 있었다.
“그래도 난 서울보다 여기가 편해.” P씨가 말했다. 자카르타에서 20년을 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나 같은 이민 초짜에겐 P씨가 꼽은 3개의 지옥보다 더 깊고 어두운 지옥이 있으니, 바로 ‘의미의 지옥’이다. 왜 남의 나라에서 살겠다고 비자를 구걸하고 행여 아플까 두려워하고 교통 지옥에 시달리는가. 도대체 왜?
나는 아직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왠지 더 버텨보고 싶다. “올해 바닥을 쳤어! 내년엔 올라갈 거야!” 새 사업이 잘되지 않는 P씨가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수도 있죠.” P씨가 소름이 끼친다는 시늉을 했다. 남의 나라에 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 사회의 기생충은 되지 말아야 한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교민과 현지인의 등을 치며 살아가는 기생충 같은 존재들에 대해 많이 들었고, 직접 만나기도 했다. 최소한 이 사회에 기생하지 않고 이 사회와 뭔가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때, 남의 나라에서 사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생충론’까지 꺼낸 뒤 술기운이 올랐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날의 술자리는 윤동주의 시구를 패러디하며 끝났던 것 같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술이 이렇게 쉽게 들어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유현산 소설가</ji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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