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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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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날다

<한겨레21> 제1회 ‘손바닥 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등록 2009-11-20 10:51 수정 2020-05-03 04:25
여성 노동자의 고공농성을 다룬 소설 의 ‘손바닥 문학상’ 당선을 계기로, 은 소설 같은 현실과 역사를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를 감상한 뒤, 일제강점기에서 오늘까지 끝없이 농성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난쟁이들’의 외침을 되새기고, 한국 사회를 성찰하는 농성의 사회사를 짚어본다. 그리고 기륭에서 용산까지, 최근에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농성장의 이면과 농성 뒤의 얘기도 담았다. 생사의 경계까지 오갔던 단식농성·점거농성·고공농성은 일단 멈췄지만, 그들의 투쟁과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 뒤로 ‘한반도의 농성장화’ 현상은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편집자

신수원

1

똥을 담은 바구니가 휘청휘청 줄을 타고 내려가고 있다. 어젯밤 몸 밖으로 밀어낸 배설물을 담은 바구니는 줄 끝에 매달려 허공에서 바람을 따라 겅중거렸다. 공중에는 늘 크고 작은 바람이 지나다녔다. 고공을 가르는 바람에 탑 철제 난간이 둔중하게 흔들렸다. 흔들림이 난간 바닥을 딛고 있는 발바닥에 전해지면서 바닥에 깔린 스티로폼이 푹 꺼지는 착각이 일었다. 곧바로 온몸을 전율처럼 감싸는 현기증이 뒤따랐다. 나는 허리에 닿아 있는 위쪽 난간을 힘주어 잡고 몸의 중심을 유지했다.

오리 날다.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오리 날다.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굵은 시멘트 기둥 한편에 박힌 철제 사다리를 따라 가장 꼭대기에 오르면 기둥을 빙 둘러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폐쇄회로 점검을 위한 이곳은 몸이 빠지지 않을 정도의 간격으로 철제를 이어 바닥을 만들고 허리 높이의 난간을 세운 것이 전부였다. 난간의 폭은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야 할 정도로 좁았다. 난간 밑으로 세로로 걸린 비정규직 철폐 현수막이 펄럭였다. 하루 중 다리를 뻗고 있을 때는 서 있을 때를 제외하면 잠을 잘 때뿐이었다. 시멘트 탑을 마주하고 탑의 타원형 모양을 따라 옆으로 누우면 탑을 감싸는 자세로 무릎을 펼 수 있었다. 광장 쪽으로 등을 돌리고 탑을 마주 안고 자는 꼴이었다. 무릎을 펼 수는 있었지만 한 방향으로만 자야 하므로 온몸이 굳고 쑤시는 고통이 따랐다.

철제 난간을 붙잡고 서서 바구니가 무사히 역 광장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착하는 것을 지켜본다. 광장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간혹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두레박처럼 매달려 내려가는 바구니를 올려다보았다. 똥바구니는 무사히 땅에 안착해서 치워졌다. 동료들은 변기를 통째로 내려달라고 했다. 매번 변기를 받아 내려 깨끗이 닦아서 올려주기 위해 그것만을 담당하는 동료까지 정해졌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한두 번으로 끝날 일도 아니고 매일 대소변을 동료에게 맡겨 치우게 하는 것은 공중에서 잠을 자고 하루를 견디는 것보다 불편한 일이었다.

나는 동료들이 배설물에 손을 대지 않도록 날마다 일정한 규칙으로 치러지는 의식처럼 배설물을 정성들여 처리했다. 신문지로 여러 겹 꼭꼭 싸매고 돌돌 말아 다시 비닐에 넣어서 내려보냈다. 그마저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바구니가 무사히 지상에 안착해서 쓰레기봉지에 들어갈 때까지 난간에 선 채 땅으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아침마다 귀한 연인을 배웅하는 사람처럼 망연히 서서 똥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가 쓰레기 무더기에 묻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을 했다.

아침 8시 철탑 아래 광장에는 여느 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오늘 모인 출투 대오는 여섯이었다. ‘대오’라는 표현이 옹색한 인원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했다. 해고된 공장의 출근 시간에 맞춰 정문으로 출근 투쟁을 나가기 위해 내가 있는 ○○역 광장의 폐쇄회로 탑 아래에서 사전 집결을 했다. 동료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필 수는 없지만 참여하는 사람은 빤했다. 해고된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참여 인원은 줄어들었다. 휴대전화 문자 한 통으로 해고 통지를 받았을 때 생겼던 크고 강한 분노와 정의감은 시간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무력해졌다.

최소의 생활비는 한두 달 만에 바닥을 드러냈고 쌓이는 연체 고지서의 압박과 앞날의 불안 앞에서 해고로 입은 자존심의 상처를 돌아보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 작은 힘이라도 한목소리로 단결해야 한다는 구호와 약속을 뒤로한 채 일용직이든 파트타임이든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동료들은 흩어졌고 대오는 줄었다.

원숙이가 손을 흔들었다.

“언니, 저 왔어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원숙이는 하청라인 일용직으로 나가고 있었다. 하청 생산라인에서 생긴 당일 결원을 충당하는 일종의 스페어 인력이었다. 갑자기 일이 생기거나 휴가를 낸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의 자리를 채워 일하고 일당을 받았다. 아침 일찍 라인이 돌아가기 전에 현장에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결원이 있으면 라인에 투입돼 일당을 벌 수 있었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올 때도 많았다. 막노동 인력시장에서 일거리가 주어지는 방식과 비슷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보다 못한 조건이었다. 원숙이가 소속된 인력회사와 배당된 하청별로 인력을 실어다주는 곳이 각각 달라 관리 명목으로 일당의 일부를 떼어갔다. 하청라인에서 일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보다 적은 원숙이의 일당은 막노동 인력시장에 비해 훨씬 많은 중간 손들을 거치고 난 뒤 원숙이에게 전해졌으므로 턱없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양손을 흔드는 것으로 원숙이에게 반가움을 전했다. 원숙이가 한 손을 귀에 대며 나중에 통화하자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래, 알았어.”

내가 원숙이에게 큰 소리로 대답하자 동료들이 입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외쳤다.

“그 동네 오늘 공기는 어떻습니까? 간밤에 춥지는 않으셨어요?”

“높은 동네는 살 만합니다. 좋아, 바람이 차긴 한데 아직은 괜찮습니다.”

손을 흔들면서 전철역을 지나는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빠르지 않고 또렷하게 큰 소리로 답한다. 흔드는 손을 따라 윗옷이 가슴께까지 부풀며 바람에 들썩였다.

여전히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처연한 생존 방식도 사람들의 무관심과 망각을 이길 수는 없었다.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출근길을 서두를 뿐 한 달 가까이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똑같은 풍경에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랜 투쟁은 구경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다 그렇게 사는 거라며 복잡하게 굴지 말고 체념하라는 욕설은 관심이었으므로 차라리 달았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고립감이었다. 철저한 무관심은 거액의 보상금을 노리는 짓거리라는 오해나 동료들의 배반보다 예리한 칼날이 되어 가슴을 후볐다.

2

똥이 담긴 바구니를 내려보내고 오늘 필요한 생필품과 식사가 담긴 바구니를 받았다. 공수 작업이 끝나자 그나마 고개를 들어 힐끗 봐주던 사람들의 눈길도 없어졌다. 사람들은 시설물에 얼마간 불편을 주겠다는 공사 중 팻말을 보는 것처럼 탑 아래 광장을 덤덤히 지나쳤다. 난간에 서 있는 내 모습은 정작 바구니에 담겨 내려가는 똥만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쓴 입맛을 다시며 난간을 잡고 멀리 뿌연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철역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언제나 스모그가 끼어 있었다. 스모그를 뚫고 하루를 밝히는 해가 힘겹게 빛을 발했다. 다른 날보다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햇살은 어정쩡하게 회색 하늘에 가려져 있었다. 탑에서 맞는 해는 따갑고 길었다. 오늘 낮 동안은 강렬한 땡볕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난간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삼복더위가 지나고 탑에 올라온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여름과 같은 기온이어도 9월의 바람과 볕은 아침저녁으로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허리와 등줄기가 뻐근했다. 광장의 천막 주변으로 경찰차가 상주하고 있었고 사업장 담당 이 형사가 무전기를 들고 한가로이 동료들을 살피고 있었다.

간혹 사람들은 연인의 변심과 혹은 구직의 어려움에 분노해 즉흥적으로 한강 다리 위에 올라가 자살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볼 때처럼 고공의 폐쇄회로 탑에 올라가 있는 무모함에 혀를 차며 지나갔다. 2년6개월이 넘도록 온갖 방법으로 진행한 농성과 항의는 사람들에게 그러려니 하는 익숙함만을 던져줘 도저히 충격이 되지 못했다. 세상의 관심과 사람들의 눈길을 한 번만이라도 붙잡아보자고 안 해본 노릇이 없었다. 눈비를 맞으며 아침마다 공장문 앞으로 가서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하루를 시작했고, 근처 사업장이나 버스 정류장, 전철역에서 카드대출 사채 전단을 뿌리는 사람들과 섞여 뿌린 홍보 전단이 수십 만 장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억울한 사정을 알리기 위해 탈진을 해서 실려갈 때까지 단식을 한 적도 있었다. 목숨을 걸었지만 단식으로 얻은 세상의 반응은 신문의 칼럼 두 번과 정말 죽을 각오를 했으면 쇼하지 말고 죽어보라는 노조 홈페이지의 댓글이었다. 밥 먹듯이 경찰서로 연행이 되었다. 전경 두 사람이 사지를 들면 힘에 부쳐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전경버스에 짐짝처럼 실렸다. 내 몸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은 참담했다. 그렇게 전경버스에 실려 수도권 아무 곳에나 짐짝처럼 버려졌다. 주위를 둘러보면 논밭만 있는 이름도 모르는 곳이기도 했고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이기도 했다. 달랑 들려가는 연행을 저지하고 조금이라도 더 버텨보려고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엮어 고정하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육교와 전철역에서 연좌농성을 한 적도 있었다. 지나가던 대여섯 살배기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저 사람들 왜 저래?”

몹쓸 것을 보기라도 했다는 듯 아이 엄마가 아이 얼굴을 가렸다.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 알았지? 얼른 가자.”

손을 잡은 엄마에게 이끌려가는 아이는 고개를 돌려 자꾸만 우리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보이는 관심을 무용담 삼아 그날 일과를 얘기 나눌 만큼 우리는 세상의 관심에 목말라했다.

하루 중 가장 힘겨운 것은 배설 행위였다. 먹고 싸는 일이 이렇게까지 구차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몸을 돌리기도 좁은 공간의 코앞에서 대소변을 치우다 보면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물을 내리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세세한 정황을 어쩔 수 없이 맛보게 되었다. 변의 굵기와 냄새는 물론 색깔과 점도까지 일일이 오감을 자극했다. 싫다고 피할 수도 빠르게 서두를 수도 대충 처리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공간은 좁았다. 고개를 돌리는 간단한 몸놀림도 쉽게 할 수 없었다. 난간 밖으로 떨어지면 무엇이든 끝이었다. 난간을 벗어나는 순간 다시 주워 담거나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고공의 공간은 같은 속도의 조심스러운 몸가짐과 움직임만을 허락했다. 마치 정해진 법칙대로만 움직이는 제의에 임하는 것과 같은 엄숙함이 요구됐다.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배변에 이르는 모든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속도와 침착함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오리변기에 앉아 신문지를 깔고 일을 보았다. 35m 고공에서 오리변기에 앉아 배설하는 일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한 일상이 되지 못했고 그때마다 낯설었다. 집을 벗어난 환경만으로도 변비에 걸리기 일쑤인 과민성 대장을 생각하면 공중에서, 더구나 사방이 개방된 곳에서 배설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난간 바닥에는 스티로폼을 깔고 난간 테두리를 따라 현수막을 둘러 가리개로 삼고 있었지만 엉덩이를 까고 내 속에서 무언가가 쑤욱 빠지게 하기 위해 힘을 주고 기다리는 작업은 곤욕스러웠다. 변기에 앉아 있는 와중에 강한 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리는 탑의 진동을 느끼며 이미 시작된 배변을 순조롭게 마무리하지 못해 쩔쩔맸다. 철제 난간을 붙잡고 1초라도 빨리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나도 모르게 헛심을 주고 또 주었다. 그럴 때면 밀폐된 일상적인 화장실에서의 배변이 눈물겹게 떠올랐다. 밀폐된 공간을 갈구하며 눈을 감아 나를 밀폐시켰다. 오리변기를 타고 앉아 지상 35m의 공기를 맡으며 눈을 감고 힘을 주노라면 현기증이 일어 난간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꽉 주어야 했다.

식사와 물수건, 생수 등이 담겨 올라온 바구니의 내용물을 차례대로 정리했다. 입안이 까칠했다. 생수를 따서 입안 가득 한 모금 마셨다. 탑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여전히 아침 해가 가려져 있는 하늘은 흐렸다. 동료들이 계열사 앞과 국회 앞으로 오전·오후 농성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전철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구니에 담긴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았다. 하얀 물수건이 새카맣게 변했다. 도심의 전철역 하늘 가운데를 지나는 공기는 탁하고 검었다. 바람이 잦은 날은 목구멍이 칼칼해 한낮의 더위가 사라지면 마스크를 한 채 밤을 보내기도 했다. 밝은 아침 마스크 바깥쪽을 보면 전철역의 하늘처럼 진한 회색이 돼 있었다. 뒷물을 하고 속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고공농성을 자원했을 때 의식주의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치밀한 대비를 하고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고공에서 잠을 자고 일과를 보내는 것 다 좋았다. 씻지 못하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었다. 둔감해지지 않는 것은 배설과 속옷을 갈아입는 정도였다. 팬티를 벗을 때면 아래에서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불안감과 가랑이 사이 생살에 닿는 바람이 싫었다. 불편해 갈아입기를 미룬 팬티 안쪽은 분비물이 체온에 굳어 구덕구덕 코딱지처럼 켜를 만들기도 했다.

3

고향에서 서울로 처음 왔을 때가 열일곱이었다. 큰언니는 중학교 진학조차 못한 어린 나이에 구로공단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한 나를 큰언니에게 올려보냈다. 큰언니와 함께 지내던 가리봉 사글세방을 사람들은 ‘닭장집’이라고 불렀다. 아기자기한 큰언니의 자취 살림과 날마다 냄새가 좋은 스킨·로션을 바르는 것이 좋았다. 시골에 비해 비좁고 답답했지만 모든 게 편리한 곳이었다. 가장 불편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아침 출근 시간이 같은 사람들은 배설을 하는 시간도 거의 일치했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일을 보면 되겠다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또한 그 집에 사는 사람의 3분의 1은 되는 셈이어서 일찍부터 화장실 앞은 꼬리를 물고 줄이 이어져 있었다. 겨우 줄을 서서 들어간 화장실에서 앞사람이 본 배설물의 냄새를 고스란히 맡아야 하는 일은 식구들이 비위가 좋다고 인정한 나의 속이 뒤집힐 정도였다. 그렇게라도 일을 무사히 치르는 아침은 행운이었고 앞에 늘어선 줄의 길이가 같아도 성격 느긋한 누군가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으면 화장실 진입을 포기하고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큰언니 소개로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모든 게 신기했다. 반듯하게 잘라진 가죽들이 미싱을 순서대로 지나고 기계 두어 개를 지나면 별의별 모양의 가방으로 뚝딱 만들어졌다. 나는 미싱 받침대 두 개를 오가며 실밥을 잘라내고 이어진 물건들을 낱개로 챙기고 다음 미싱으로 옮겨 정리해주는 일을 했다. 종일 쪽가위를 사용하느라 엄지 손끝이 짓무르고 파스를 붙이도록 손목이 아팠지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출근하면 잠깐 사이 점심시간이 되었고 금방 퇴근 시간 벨이 울렸다. 이어지는 야근 잔업이 고됐지만 수당을 생각하면 별것 아니었다. 어차피 일찍 집에 가도 텔레비전을 보는 것밖에 하는 일도 없었다.

공장에서도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점심시간에는 화장실마다 사람이 들어차 있어서 줄을 서도 시간 내에 들어갈 수 없었고, 작업 시간에 화장실을 가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급하게 미싱사 언니에게 얘기하고 갔다 하더라도 반장에게 걸리면 본보기로 혼쭐이 났다. 소변을 보고 오는 것도 힘든데 큰 볼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집에서는 공동 화장실에서, 공장에서는 작업 시간과 전쟁을 치르느라 사나흘에 한 번 변을 보기도 편치 않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소변은 방에 딸려 있는 아궁이를 겸한 작은 부엌 하수구에서 해결했다. 하수구를 향해 쪼그려 앉으면 아궁이에 걸려 있는 양은으로 만든 큰 물솥 날개가 엉덩이 곁에 닿을 만큼 좁은 부엌이었다. 더운 오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아무도 없는 부엌의 찬장과 옆구리에 걸려 있는 양은솥이 알엉덩이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 팔을 다 뻗을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쌀을 씻고 설거지를 하고 오줌을 쌌다. 큰언니는 오줌을 눌 때마다 호수를 대고 빗자루로 씻어내리라고 했지만 나는 슬쩍 물만을 흘려보내고 그만이었다. 수채 구멍을 드나드는 커다랗고 시커먼 쥐가 지린내를 맡고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 아랫도리를 치키며 후다닥 방으로 들어왔다.

큰언니가 형부와 결혼을 해서 자리를 잡은 곳이 독산동이었다. 나는 동생과 독산동의 반지하 방으로 사는 곳을 옮겼고 구로공단은 세련된 디지털단지로 탈바꿈을 했다. 가방 공장에서 몇 차례 공장을 옮기는 동안 나는 전자부품을 조립하는 비정규직이 돼 있었다. 내가 원해서 직장을 옮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장이 문을 닫기도 했고 중국으로 생산라인을 이전하기도 했다. 계열사 공장을 모두 합병하면서 감원 인력 대상이 되어 쫓겨나는 신세가 된 적도 있었다. 동생과 살게 된 반지하 전셋집은 주인집을 빼고 네 가구가 화장실을 함께 사용했다. 싱크대가 놓인 입식 구조의 부엌 바닥에는 씻을 수 있도록 수도와 하수구가 설치돼 있었다. 언니와 살던 닭장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생과 나는 소변 정도는 거기서 해결했다.

“언니 어떡하죠. 일 터졌어요.”

“왜, 원숙아.”

“사람들 전부 연행되었는데요. 다치고 병원이랑 경찰서에 있대요. 저밖에 없으니까 가봐야 할 것 같거든요. 여기는 단체 분들한테 연락을 드렸으니까 온다고 했는데요.”

“그래, 알았어. 침착하게.”

“단체 사람들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언니 혼자 있어도 괜찮은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경찰서가 두 군데로 나눠 있대요. 거기 다 가봐야 하고 병원도 그렇고.”

“그래, 염려하지 말고 네가 얼른 가서 뒷일 봐야겠다. 내 걱정은 할 거 없어. 얼마나 다쳤는지 여기서도 연락해볼게. 중간중간 꼭 연락주고.”

원숙이는 통화를 하면서도 천막에서 나와 탑을 올려다보며 말했고 나도 일어서서 난간을 붙잡고 나머지 한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말했다. 바람 소리가 들어가 휴대전화에서 쇳소리가 났다. 남아 있는 사람이 10여 명이 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빠지고 나면 대여섯 명에서 서너 명이 일정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몽땅 연행이 되었다면 연락을 취하고 일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원숙이 한 명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인원이 줄어들면서 전원 연행을 하며 대오를 자극하는 일보다는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방치했다. 전원 연행은 불안한 조짐이었다. 뿌옇게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기다란 전철이 요란한 신호음을 앞세우고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육중한 전철이 들어올 때마다 그 속도와 무게가 탑에 전해져 진동이 왔다.

단체에서 온다는 사람들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오지 않았고 동료들은 48시간 내에 풀려날 것이라는 연락을 원숙이에게서 받았다. 그 사이 나는 한 번 먹을 분량만을 남기고 생수를 마셨고 간식으로 초코파이 하나를 먹었다. 오리변기에서 소변을 두 차례 보았고 페트병에 그것을 따르는 의식을 무사히 치렀다. 여름이 지나고 있었지만 해가 지면 지상 35m 고공은 지상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차가웠다. 나는 겨울용 파카를 걸치고 지퍼를 여몄다. 역 광장에는 아무도 없는 깜깜한 천막이 스산하게 버티고 있었다. 동료들은 오늘 풀려나오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오겠다고 연락을 해왔던 단체에서는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텅 비어 있는 천막 주변으로 사복형사 한 사람이 차에서 나와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배가 고팠지만 한 끼쯤 안 먹는다고 큰일 날 것은 없었다. 경찰서와 병원에 실려가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여기서 한가로이 제때 식사를 하는 것도 미안할 노릇이었다. 동료들이 극성스러우리만큼 챙겨대지 않는다면 나는 하루 한 끼 정도만 먹으면서 이곳에 있고 싶었다. 괴로운 배변의 횟수도 3분의 1로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것을 살아가는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동료들이 고공농성을 하는 내게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으므로 나는 아예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서로 정해진 지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동료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수고를 덜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식사의 횟수가 아니라 양을 줄여본 적도 있었다. 식사를 남기자 천막의 동료들이 지나치게 걱정을 하는 통에 변명을 하느라 서로 수선만 더하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어떤 꼼수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올라오는 모든 것들을 먹고 주어진 시간에 충실히 잠을 자려고 했고 의연하게 일과를 채웠다. 아침이면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낮이나 퇴근 시간에는 지원 방문을 오는 다른 사업장이나 지원 단체의 사람들에게 건재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난간에 서서 약식 집회를 했다. 나머지 시간은 땡볕을 막기 위해 비닐 사이에 헝겊을 덧대어 볕을 막고 책을 보았다. 해는 길고 따가웠다. 밤에는 파카를 껴입고 철탑에 기대앉거나 쪼그리고 누워 광장 옆의 백화점 건물 현관에서 쏟아지는 빛이 도로와 광장을 화려하게 덮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겠다던 지역 단체 사람들은 시간을 한참 지나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도 뜸해지는 늦은 시간에 탑 아래로 모여들었다.

“일단 따뜻하게 식사하세요. 서둘러 온다고 했는데 연행자와 관련해서 의원님과 대책을 논의하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시장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연행된 동지들은 별일 없이 풀려날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식사하십시오.”

통화를 하고 약식으로 구호를 외치고 저녁을 올려주면서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들에게는 바구니를 올리고 내리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몇 차례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나서 올려준 저녁 식사 바구니에는 평소 먹던 것보다 고급인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지역 국회의원이 보낸 것이라고 했다. 동료들이 만들어주는 별식이 가끔 올라오긴 했지만 대부분 시중에서 구입한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 지역 의원이 보냈다는 도시락은 갖가지 튀김과 생선초밥까지 구색을 맞춰 들어 있었다. 초코파이 하나로 때운 속이 허했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있는 된장 국물을 마셨다. 뒷맛이 들쩍지근했다. 한입에 들어오는 초밥을 씹자 코끝이 싸해지는 고추냉이에 눈물이 찔끔 났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단체 회원들은 탑 아래 천막 밖에 앉아 자리를 지켰다. 탑과는 꽤 먼 거리에 있었지만 동료들이 없는 천막을 지키는 그들이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빈 생수통과 쓰레기들을 모아 바구니에 챙겨 내려보냈다. 소변을 담은 페트병이 거의 다 찼지만 나는 그것을 바구니에 담지 않았다.

흐릿해진 날씨가 가늘게 비를 뿌렸다. 아침에 동료들이 올려준 신문에서 확인한 일기예보는 아침 한때 안개 후 대체로 맑음이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산업 불황 여파를 타고 몰아친 국내 자동차 업계의 일방적인 대규모 구조조정 방침에 노조가 극렬하게 항의하며 농성에 돌입한 장면으로 채워진 신문이었다. 노조의 공장 점거 농성이 결정되기 전에 공장 굴뚝에 올라가서 농성 중인 간부들의 사진도 실려 있었다. 아득한 굴뚝에서 머리 위로 펼쳐든 띠수건에는 ‘해고는 죽음이다’라는 농성 구호가 적혀 있었다. 전 재산을 모아 아들·며느리까지 매달려 꾸려온 가게가 아무런 보상이나 대책 없이 철거되는 억울함을 항의하던 나이 든 가장들의 죽음을 말하는 기사도 지속적으로 실리고 있었다. 장례조차 미룬 주검이 안치된 영안실 대여료가 1억원대를 넘고 있다고 했다. 광화문에는 길거리에서 치러진 월드컵의 아쉬움을 채워줄 광장이 만들어졌으나 축제는 인정하지만 사람이 모이는 집회는 불허한다는 방침을 두고 칼럼과 논설은 연일 갑론을박했다. 그칠 비 같지 않게 빗줄기가 잦아졌다. 동료들이 모두 연행됐으므로 알아서 날씨에 대비해야 했다. 앉아 있는 공간만큼만 난간에 비닐을 덮어 천정을 만들고 옆으로 나와 우비를 챙겼다. 우비를 가지고 있으니 어지간한 비는 문제될 것 같지 않았다. 단체 사람들은 둘만 남고 돌아갔다. 동료들이 한 명도 없는 역 광장의 천막 안 불빛이 여리게 아른거렸다.

4

밤이 깊었다. 바람은 차가워지고 오솔한 한기에 명치가 떨렸다. 간혹 빠른 속도로 곁을 지나는 자동차 속도에 철탑이 울렸다. 전철역은 서늘한 불빛만을 달고 묵묵히 졸고 있었다. 첫 전철이 움직이는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역 근처를 오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어깨를 등 바깥으로 한껏 젖히고 마시는 찬 공기는 시릴 만큼 푸르렀고 내뿜는 숨은 길었다. 철탑 난간을 잡고 바라보는 하늘은 어둠 속에서도 스모그를 품고 있는 것처럼 멀고 무거웠다. 따뜻한 물 한 잔이 생각났다. 생수로 입을 축일까 싶었지만 차가운 것이 싫었다.

늦게 먹은 초밥 때문인 것 같았다. 생소한 음식 탓으로 배가 살살 아팠다. 배변의 기운이 분명하게 감지되는 것은 좋은 징조라고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엉덩이를 내놓고 있는 시간의 단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콕콕 찌르듯이 아픈 배가 심상치 않았다. 동료들도 없는 상황에서 큰 탈이라도 났거나 몸에 문제가 생겨서는 곤란했다. 천막을 지키고 있는 지원 방문자들에게 험하고 수선스러운 꼴을 보이는 것은 난감한 일이었다. 배앓이가 심해져 단체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상은 몇 안 되는 대오로 싸움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보다 더 초라하고 서글픈 일이었다. 침착하게 배를 달래며 몸이 보내는 신호에 촉각을 세웠다. 배가 부글거리면서 아파왔다. 참아서 달라질 지경이 아니었다.

오리변기에 엉덩이를 까고 앉았다. 나는 주로 새벽 시간에 배변을 시도했다. 주위의 시선에서 그나마 놓여나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탑 아래를 지나는 취객은 없는지 상주하고 있는 담당 이 형사가 올려다보는 것은 아닌지 하다못해 원거리에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라도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런 불안을 안은 채 소변은 밤까지 참을 수 없어 벌건 대낮에 땡볕 아래서 해결했다. 오리변기는 소변을 한 번만 봐도 출렁거렸다. 변기 받침을 들고 주둥이가 큰 페트병으로 옮겨 하루의 오줌을 모았다. 참기름이나 콩기름을 따르는 것 이상으로 긴장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오줌은 깔때기 밖으로 흘러 손이나 옷깃에 묻기 일쑤였다.

무서운 속도를 내며 달리던 자동차가 경적을 울렸다. 소리에 놀라 감았던 눈을 뜨며 난간을 꽉 잡았다. 빗물기가 남아 있는 철탑 난간의 습하고 싸늘한 기운이 손바닥을 감쌌다.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을 지긋하게 감고 배설을 위해 집중했다. 오늘 먹었던 음식과 물의 양을 가늠하며 이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를 생각했다. 살살 아프던 배가 울퉁불퉁 거리더니 삐죽삐죽 묽은 똥이 항문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배변 때마다 신경을 건드리는 또 한 가지는 소리였다. 묽은 변이 나오기 시작하자 커다란 소리가 염려되어 시원스럽게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방귀를 몰래 낄 때처럼 조금씩 힘을 조절하려 애를 썼다. 적막한 시간 몸을 빠져나가는 이물질들은 반드시 소리를 냈다. 철탑 아래 천막에서 잠이 든 지원방문자들이나 종종 광장에 차를 대고 밤을 새우는 담당 이 형사가 듣기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새벽녘 몸 밖으로 삐져나오는 그 소리는 아무리 의연하려고 해도 나를 수치스럽게 했다. 고공에서 치르는 배변의 불안과 수치스러움을 주는 소리, 번거로운 절차가 끔찍해서 처음 며칠은 오리변기를 사용하지 않고 참았다. 되도록 배변 횟수를 줄여볼 요량이었다. 가스가 차고 불러오는 배를 누르는 허리께가 빵빵해져서 속까지 더부룩해졌다. 참았던 배가 올챙이처럼 차올라 통증이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난생처음 오리변기에 앉았다. 한 손은 철탑 난간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배를 누르며 가스를 내보냈다. 그날 나는 쏟아낸 굳은 배설물을 처리하지 못하고 오리변기 등을 닫아만 놓은 채 한참 동안 망연히 탑에 서서 먼 하늘만 쳐다봤다.

변에 물기가 많아 오리변기에 깔았던 신문지가 소용없었다. 변기 아래 소변통까지 경계 없이 변이 흘러 있었다. 시큼하고 역한 냄새의 묽은 똥을 싸고 나자 창자를 찌르듯이 아프던 배는 진정이 되었다. 식중독이나 몸살 등으로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오리변기를 처리할 길이 막막했다. 일단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아 있는 탑 반대편에 밀어놓았다. 스산해진 날씨는 간혹 가는 비를 뿌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했고 방향 없는 바람이 제멋대로 불었다.

고공에서의 밤은 차갑고 길었다. 굵은 굴뚝 같은 원형 철탑을 따라 타원형으로 몸을 말고 토막잠을 청했다. 난간 철근 사이로 발이 빠져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겨우 위기를 넘겼다. 잠결에 몸을 뒤척인다는 것이 탑 난간 밖으로 밀려나 순식간에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둔중한 무게를 담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탑 아래로 떨어진 몸뚱어리가 땅에 처박히며 박살이 났다. 과속 차량들이 울리는 경적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탑에서 떨어지는 꿈보다 더 큰 공포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두꺼운 파카 위로 드러난 뒷목은 식은땀으로 끈끈했고 때마침 스치는 고공의 바람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무슨 꿈이었는지 꿈을 꾸기는 한 것인지 조금 전의 일조차 기억이 선명하게 조합되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양팔로 부여잡듯 껴안았다. 까닭 모를 두려움이 고스란히 온몸을 짓눌렀다. 탑 기둥에 쪼그리고 앉아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아래를 쳐다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큰 숨을 들이쉬고 바라보는 고공의 하늘은 아득했다. 바람은 차갑고 하늘은 아직 동을 틔우지 않고 있었다.

5

버스럭거리는 우비 소리에 잠을 깼다. 단추를 채우지 않고 걸친 우비 자락을 다잡아 여몄다. 몸을 움직이자 탑 기둥에 기대고 잠든 동안 접혀 있던 무릎이 찌릿하게 저렸다. 양쪽 어깨를 바깥으로 젖혀 심호흡을 하고 다리를 주물렀다. 전철 첫차가 아직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광장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일어서려는데 저린 다리가 마비된 듯 힘을 주기 어려웠다. 주저앉아 급하게 다리를 주무르는 손을 놀리며 난간 사이로 광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광장을 오가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단체 회원 서넛과 사복을 한 형사들이었다. 휴대전화가 연방 울리고 있었다.

“서울 지역 해고자 회의 임영석이라고 합니다. 철제 난간을 강제 철거할 것 같아요. 다른 분들에게 아는 대로 모두 연락을 취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도 오는데 개새끼들이 날을 잡은 것 같아요. 사람들 출근 시간 전에 끝내겠다는 건데요. 그러실 리 없지만 나쁜 마음을 먹으시면 안 됩니다. 민노총 당직자와 민변에도 연락을 했고 금방 많은 분들이 모일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힘내십시오.”

탑 위를 쳐다보며 다급하게 말하는 임영석이라는 사람의 목소리는 휴대전화에서인지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이 육성으로 들리는 것인지 광장을 울리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전경들과 낯선 사내들이 탑 주위로 겹겹이 매트리스를 설치하고 있었다. 소방차가 광장을 대낮처럼 밝히면서 들어오고 어느새 꼭대기에 사람을 실은 사다리차가 탑 쪽으로 붙고 있었다. 서서히 움직이는 사다리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한 손을 치켜들며 구호를 외쳤다.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성실교섭 촉구한다, 비정규직 철폐하자.”

가는 빗방울이 우비를 입은 어깨에 떨어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오른쪽 사다리차에는 전경 셋이 올라오고 있었고 왼쪽 사다리차에는 얼굴을 모르는 형사 둘과 담당 이 형사가 함께였다.

“진복연, 할 만큼 했잖아, 서로 좋게 좋게 내려가자.”

이 형사는 휴대용 확성기를 들고 말끝을 잘라먹으며 웃는 듯이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높은 곳에서는 에코가 들어간 것처럼 말소리가 울렸다. 난간을 잡은 손이 빗물에 미끈거렸다. 빗줄기는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발아래 깔아놓은 스티로폼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렸다.

“자자, 어차피 뛰어내리지도 못하잖아. 고생하지 말고 내려가자니까.”

이 형사와 사복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전경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사복은 이 형사의 말에 노골적인 웃음을 지었다.

“성실교섭 촉구한다, 비정규직 철폐하자.”

사복의 비웃음을 느끼며 나는 난간을 잡은 손을 놓고 무의식적으로 입에 밴 구호로 악을 썼다. 진회색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얼굴을 적시고 시리게 목을 타고 흘렀다. 점점 사다리차가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방향을 틀어 발을 떼는 순간 바닥에 깔았던 스티로폼 틈이 벌어지면서 무언가가 아래로 떨어졌다. 탑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단체 회원들과 그동안 불어난 몇몇 사람들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동료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한 필기구와 휴지 등을 담은 작은 사물함과 그 옆에 있던 어제 하루 모아놓은 오줌을 담은 페트병이었다. 바로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빗물에 젖은 몸과 새벽의 한기에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조심하자니까, 진복연, 어차피 내려갈 거잖아. 거 사람이 왜 그래. 여자가 똥오줌도 제대로 가리기 힘든 여기서 할 짓이 아니잖아? 좋게 내려가자.”

이 형사는 떨어진 것이 오줌을 담은 페트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벽에 치러지는 수치스러운 소리와 배설물을 꽁꽁 싸매서 바구니에 내려보내는 절차와 오리변기 바닥에 담긴 오줌을 일일이 페트병에 모아 옮겨 담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정규직으로 어처구니없는 대우를 받으며 해고된 억울함과 서러움 때문이 아니라 모멸감이 치밀어 순간적으로 난간을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이빨이 부딪치도록 추위가 느껴졌다. 발이 미끄러지면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발에 밀린 스티로폼이 벌어져 뚫린 틈으로 아득하게 광장 아래가 보였다. 이 형사의 사다리는 내가 서 있는 측면으로 얼굴을 알아볼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벌어진 바닥의 틈으로 발이 빠지거나 균형을 잃고 광장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멀댔다. 그들이 다가올수록 내 머리 속에는 온통 처리하지 못한 오리변기 생각뿐이었다. 잠꼬대로도 중얼거릴 비정규직 철폐 구호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도 까맣게 생각나지 않았다. 묽은 배설물이 담긴 오리변기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안달이 났다. 이 형사에게 또는 이 형사 옆의 저 사복에게 아니면 철탑을 철거할 누군가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오리변기를 생각했다. 수치스러움에 눈을 감았다. 몸이 떨렸다. 등 뒤쪽으로 접근하던 사다리의 전경들이 탑 기둥 중간에 안전하게 조준한 사다리를 대고 비정규직 철폐 현수막을 걷어내고 있었다. 나는 난간을 잡고 몇 걸음 뒤로 발을 옮겼다. 하늘색 주둥이를 한 오리변기가 비를 맞고 있었다. 묽은 똥의 흔적이 누렇게 변기 밖으로까지 흘러나와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싸늘한 쇠파이프의 감촉과 물기를 머금은 녹 냄새가 훅 진하게 스쳤다. 한 손으로 뚜껑을 열고 변기를 들고 일어섰다. 이 형사와 또 한 명의 사복은 얼굴에 여유를 머금고 여전히 비웃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빨간 휴대용 확성기를 입에 대고 다시 무언가 말을 하려는 이 형사가 타고 있는 사다리를 향해 오리변기를 힘껏 던졌다. 말의 안장처럼 등에 신문지를 덮은 하얀 오리가 빗속에서 공중을 날았다. 첫 전철을 타려고 새벽을 서두르며 광장을 지나는 우산들이 커다란 점처럼 하나둘 늘어났다. 철길 저쪽에서 전철이 역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전철이 들어오는 진동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난간을 잡은 두 팔에 경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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