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 은 묘한 중독성이 있는 드라마다. 첫사랑이었던 배우 은혜정(전인화)을 두고 재벌가의 딸 한명인(최명길)과 결혼해 애정 없는 나날을 보내다 결국 옛 애인을 다시 만나 딸까지 낳고 두 집 살림을 하는 대기업 부회장 이정훈(박상원)을 중심으로 한 삼각관계는 진부해 보이지만 흥미진진하다. 한명인이 죽은 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망나니 아들 민수(정겨운)는 거칠면서도 나약한 재벌 2세의 캐릭터를 은근히 매력 있게 그려내고, 그런 민수의 상대는 마냥 해맑은 명랑소녀가 아니라 ‘제2의 힐러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정계 진출을 노리는 9시 뉴스 앵커 최윤희(박예진)다.
각기 다른 욕망과 상실감을 지닌 이들의 만남은 중견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를 통해 매 순간 팽팽한 긴장을 유발하고, 그것은 SBS 의 주인공들이 울고 화내고 악다구니를 쓸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을 선사한다. 앞에서 머리채를 쥐고 달려드는 대신 뒤에서 조용히 함정을 파고 루머를 퍼뜨려 상대를 짓밟는 고단수 기술이 판치는 이 세계에서 단연 눈에 띄는 강자는 재벌 그룹 총수 한명인이다. 남편의 숨겨둔 딸을 애인으로 오해하고서도 “내가 알았으니 이제 그만 정리하세요”라며 냉철하게 대처하는 태도와 “오늘따라 정말 화사하고 아름다우십니다”라는 중역의 아부에 눈 하나 까딱 않고 “아직도 내가 여자로 보입니까?”라고 받아치는 카리스마는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철의 여인 한명인도 아들 문제에서만큼은 이성을 잃고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극성 엄마에 불과하다. 죽은 애인 대신 아들만 바라보며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문제는 ‘재벌 총수’ 엄마의 치맛바람이 한 사람의 인생을 휩쓸어버릴 만한 태풍이라는 점이다. 아들의 성희롱 피해자였던 최윤희를 향해 “네까짓 게 뭔데 어디서 여왕 흉내야? 눈길 한 번 줬다고 따귀를 올려? 화장 야하게 하고 옷발 받쳐 입고 날 좀 봐주세요, 하는데 어떤 놈이 그냥 지나쳐?”라고 다그치며 뺨을 올려붙이는 한명인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씁쓸해졌다. “이 자리 올라오기까지 이보다 더 백배 천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밟으면서 올라왔어. 그런 나를 이기겠다구?”라며 약자를 ‘밟는’ 행위에 대해 가책은커녕 우월감을 확인하는 듯한 한명인에게서 한국 사회의 부자, 혹은 강자들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엔 현실을 바탕으로 한 근거가 이미 차고 넘친다. 자신의 아들과 시비가 붙었던 데 대한 보복으로 유흥업소 종업원을 폭행한 재벌 총수가 있었고, 여기자를 성추행한 것이 문제되자 “식당 주인인 줄 알았다”는 기이한 변명을 늘어놓은 국회의원이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드라마 같은 세상을 넘어 드라마보다 더한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 둘이 뭐가 다른지 궁금하다고? 아마 ‘짐승 같은 놈’과 ‘짐승보다 더한 놈’의 차이 정도 되지 않을까.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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