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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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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엔 왜 노처녀가 많은가

등록 2004-05-21 00:00 수정 2020-05-03 04:23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공해 다음으로 많은 그녀들의 원숙한 아름다움을 아는 남자는 없다

김경/ 패션지 피처 디렉터

뉴욕, 런던, 베를린, 도쿄, 서울…, 세계의 이런저런 대도시에서 노처녀 스토리가 붐이다. 지난 주말에는 명세빈이 속물로 변해버린 첫사랑이나마 놓치지 않기 위해 비 맞은 생쥐 꼴로 어설프게 남자를 유혹하는 장면(문화방송 드라마 )을 보고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뭐야, 나도 저렇게 해야 되는 나이란 말이지.”

언제부터인가 도시는 노처녀들의 온상이 되었는데, 내 주변만 둘러봐도 공해 다음으로 많은 게 바로 노처녀인 것 같다. 사실 대도시만큼 노처녀들이 살기 좋은 곳이 없다. 노처녀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질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벌어서 소비하는 재미만으로도 한평생을 신나게 살 수 있다. 게다가 행동반경도 넓고 동지도 많아서 ‘난 결코 혼자가 아니라’며 끝까지 버텨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니다. 간혹 같은 처지들끼리 회동하여 긴급 대책회의라도 하면 정말로 마음이 착잡하다. 난자의 질이 떨어지고 호르몬 밸런스가 어떻고 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까지 나오면, 아직 내 일이 아닌 듯 슬쩍 자리를 피하고만 싶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싶어 이런저런 공모를 해본다. 그 중 가장 우스꽝스러운 작전은 이런 것이다. 명세빈처럼 결혼정보회사에 사진을 보내줄 ‘올케’가 없으니, 내 스스로 구인정보의 문안을 작성해서 신문사에 보내는 거다.

◈ 남편감을 찾습니다 ◈
이름: 김경, 나이: 33세, 직업: 잡지사 기자
결혼생활 전망: 남자에게 전적으로 부양의 책임을 넘기지 않고 남자를 내버려둘 줄 아는 이해심 많은 여자라 결혼생활이 꽤 자유로울 수 있을 듯. 즉, 바람 피울 여지가 많다는 말.
응모자격: 만 19∼45살의 대한민국 총각과 이혼남.
선택기준: 같은 주거공간에서 대화하고 섹스하는 일이 즐거운 직업인. 단, 생활비의 절반은 필히 부담할 수 있는 사람.
연락방법: 서울시 중구 정동 15-5 정동빌딩 5층 로 편지를 보내주오!

아,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문제는 제대로 된 독신 남자는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불안감이다. 미래지향적이고 능력 있는 남자들은 우리처럼 드세 보이는 노처녀들을 눈곱만큼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이든 남자들일수록 젊은 여자를 좋아한다. 서른 넘은 여자의 원숙한 아름다움을 높이 사주는 남자는 그저 특이한 취미를 가진 남자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별미’로서의 유효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그리고 서른일곱을 넘기면 그조차도 거의 끝장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사는 독신녀들의 집에 놀러 가면 마음이 착잡하다. 널찍한 거실에 침실과 옷방을 따로 두고 있을 만큼 공간도 여유 있고, 자기 개성껏 꾸민 인테리어도 훌륭하다.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멋진 주거공간이다. 그런데 그걸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독신녀들이 때로는 유령처럼 보인다. 어떨 때 ‘노처녀는 이 도시의 풍토병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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