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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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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렁한 양복쟁이들에게

등록 2005-04-14 00:00 수정 2020-05-03 04:24

키 작고 다리 짧은 체형도 멋지게 만드는 ‘진짜 슈트’의 힘을 아는가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양동근이 출연하는 연극 <관객모독>을 보러 갔다. 오랜만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관객을 모독하려고 작정을 한 네명의 배우에게 모욕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쌍욕을 들을 땐 왠지 속이 시원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였다. 게다가 예상보다 양동근의 무대 연기가 썩 훌륭했다. 자연스러웠고 ‘초짜’치고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양동근의 연기가 다른 세명의 연극배우보다 훌륭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무대에서 다른 사람은 결코 발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양동근만의 미덕을 나는 보고 말았다. 헐렁한 청바지를 엉덩이에 걸쳐입는 걸 목숨처럼 여기는 힙합 보이도 연극 무대에서만큼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버리고(때로 힙합 패션은 힙합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처럼 보인다) 양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는데, 재미있는 건 양동근의 넥타이 길이만 허리띠 중간쯤에 제대로 놓여 있고 다른 두 중견 배우의 넥타이 길이는 애처롭게 길었다는 것. 허리띠 아래로 반뼘쯤 길게 내려온 넥타이는 키가 작은 Y씨가 더 작아 보이게 만들고, 약간 살이 찐 J씨를 더 둔하게 보이게 했다.

그게 어디 Y씨와 J씨만의 문제일까? 우리나라 남자들 중에 슈트를 슈트답게 입을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장 큰 비극은 대부분의 우리나라 남자들이 단지 편하다는 구호 아래 제 몸보다 크고 헐렁한 양복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슈트가 단지 지겨운 유니폼이 아니라 남자의 몸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견장이라고 할 때(영화 <나를 책임져, 알피>의 주드 로가 그 이상적인 본보기다), 중요한 건 제냐나 질 샌더 같은 슈트 안감에 붙은 라벨이 아니라, 제 몸에 잘 맞는 것이어야 한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미국 남자들보다 섹시해 보이는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어깨도, 엉덩이도, 허리도 제 몸에 잘 피트되는 질 좋은 슈트에 투자할 줄 안다.

혹시 키 작고 다리 짧은 한국인 체형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영화배우 데니 드비토를 떠올려봐라. 그 남자만큼 저주 같은 체형을 가진 배우도 없을 거다. 하지만 그만큼 몸에 잘 맞는 핀 스트라이프 슈트를 멋지게 소화해내는 배우도 그다지 흔치 않다. 몸에 잘 맞는 슈트는 체형을 커버해주기 때문이다. 반면 조지 부시는 다이어트로 살을 빼놓고도 옛날에 입던 큰 사이즈의 옷을 그냥 입고 있는 듯한 스타일 때문에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패션계에서는 잘 알려진 얘기인데, 칼 라거펠트라는 초특급 스타 디자이너는 에디 슬리먼이라는 애송이 디자이너가 만든 날씬하게 피트되는 슈트를 입기 위해서 엄청난 다이어트를 했다.

그렇다면 몸에 잘 맞는 슈트란 어떤 것인가? 소매나 어깨선이 맞는 건 기본이고 재킷을 입었을 때 가슴 부분이 굴곡 없이 팽팽해야 하고 등과 옆부분도 그 안에 보따리를 숨길 수 있을 만큼 크면 안 된다. 엉덩이도 청바지를 입은 것처럼 그 주변이 뜨면 안 된다. 말하자면 몸 전체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피트되어야 한다. 또한 바지 길이는 복숭아뼈 아래로 내려올 정도여야 하고 셔츠는 단추를 채우고 0.5cm의 여유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리고 타이의 끝부분은 벨트 버클 중앙에 닿아야 한다. 그것만 기억하면 된다.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이 있다면 한국인과 미국인 말고는 요즘은 모두들 소매통이 좁은 재킷을 선호하는데, 그건 헐렁하게 펄럭이는 소매가 편할지는 몰라도 전혀 우아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사 아직도 드레스셔츠 안에 러닝셔츠를 입거나 반팔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남자들이 있는데 이런 충고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식당에서 버젓이 코털을 방치해두고 있거나 덥다고 바짓단을 무릎까지 걷어올린 남자만 아니라면 천만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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