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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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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콜, 플라잉 시티

등록 2005-03-31 00:00 수정 2020-05-03 04:24

“아방가르드와 부르주아는 황금의 탯줄로 연결돼 있다"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주로 옷을 편의점에서 사 입는 ‘플라잉 시티’라는 험블한 예술가 그룹이 있다. 주로 달동네나 청계천 같은 문제적 장소에서 난장 치듯 놀면서 한국의 도시 문제를 제기하는 미술가 그룹인데, 갤러리에서 돈으로 거래할 만한 작품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부업으로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의 대표작은 청계천에 천막을 치고 상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다가 급기야는 청계천 이주민들의 새로운 터전을 위한 ‘만물공원’ 모형을 제시했던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조용한 고급 주택가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을 외치는 퍼포먼스를 벌일 때 동네 개들이 요란스럽게 짖어대던 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뭐랄까? 고급 미술 안에서 동네 개들 말고는 그들의 의미 있는 ‘헛소동’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명품 중 명품으로 알려진 에르메스라는 최고가 브랜드가 그 험블한 청년들에게 러브콜을 보내면서 그들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가 부쩍 높아졌다. 지난해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최종 후보에 올라 아트 선재에서 무려 한달간이나 작품을 전시할 기회를 얻더니, 최근에는 자신들의 설치 작품으로 에르메스 매장의 쇼윈도를 꾸민 것(사진).

얼마 전 에르메스 코리아의 전형선 사장과 플라잉 시티를 함께 만날 일이 있었는데, 전형선 사장은 혹시라도 플라잉 시티가 이번 프로젝트 때문에 문화계에서 고립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저 플라잉 시티라는 청년들과 그들이 만든 작품이 좋아서 의뢰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매판 자본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플라잉 시티가 욕을 먹을 수도 있잖아요.” 이에 대한 플라잉 시티의 리더인 전용석의 대답이 압권이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30년대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방가르드와 부르주아는 황금의 탯줄로 연결돼 있다’.”

해석하자면 부르주아들은 아방가르드들이 표방하는 저항과 자유와 위트의 정신을 사들이고, 아방가르드는 대중 문화와 만나면서 대중성과 상품성을 확보한다는 얘기일 텐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2003년 봄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루이뷔통의 무라카미 백이다. 세상 물정 밝기로 유명한 루이뷔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크 제이콥스가 일본의 오타쿠 아트를 대표하는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 때문에 루이뷔통의 전통을 상징하는 모노그램 백이 키덜트를 위한 컬러풀하고 유머러스한 백으로 탈바꿈했고, 최소 1천달러를 호가하는 무라카미 라인은 전세계적으로 품절 상태일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패션과 아트의 만남은 결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샤넬은 피카소, 장 콕토 같은 당대 예술가 등과 폭넓게 교류하며 이들의 문화활동을 금전적으로 지원했고, 이브 생 로랑이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그대로 재현한 미니 드레스를 만든 이후로 패션 디자이너들은 시시때때로 아트에서 새로운 영감을 찾았다), 무라카미 백의 성공 신화 이후 더욱 적극적인 방법으로 패션과 아트의 접목이 시도되고 있다. 그 중에서 이번 시즌 가장 눈에 띄는 제품은 영국의 유명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이 디자인한 롱샴의 실용적인 나일론 백과 일본 작가 5명의 그림을 담은 이세이 미야케의 리미티드 에디션 라인들.

특히 자국은 물론 타국의 유명 디자이너들에게 불려다니며 국제적인 지명도를 높이고 있는 일본 작가들을 생각하면 부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그림이 프린트된 옷은 아직까지 갤러리 아트숍에서밖에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영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후져서일까? 아니면 우리나라가 후지기 때문일까?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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