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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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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벽보고 얘기하지

등록 2005-04-21 00:00 수정 2020-05-03 04:24

벽면 꾸미기 프로젝트, 패브릭·벽화·디지털프린트 단계별로 골라봐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살다 보면 ‘차라리 벽 보고 이야기하지’ 싶은 때가 많다. 그 때문에 얼마 전부터는 아예 ‘이야기하고 싶은 벽을 만들자’는 계획 아래 이런저런 시도를 모색하고 있다. 관심 갖는 것만큼 보인다더니, 잡지를 보든 카페에 가든 이제는 벽면 꾸미기와 관련된 것들만 눈에 보인다.

큰돈 들이지 않고 밋밋하고 칙칙한 집안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한쪽 벽만 빨간색 페인트로 칠하거나 그림이나 패턴이 그려진 패브릭을 걸어두는 거다. 게다가 요즘은 단지 시침핀으로 벽지 위에 살짝 고정시키는 것만으로 근사한 그림이 될 것 같은 질 좋은 패브릭들이 무척 많이 나와 있다.

두 번째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거다. 압구정동에서 유일하게 흙을 밟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서머셋’이라는 바가 있는데, 그 바의 한쪽 벽면에는 바람에 머리채를 흩날리는 주홍색 자작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 그림 하나 때문에 공간뿐 아니라 그 공간의 주인장에게도 서정적 판타지가 흐르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포토그래퍼 전재호의 스튜디오 벽면에 그려져 있던(정확하게는 청테이프 같은 걸로 붙여서 표현한) 커다란 불도그 그림도 멋졌고, 설치작가 김희경이 자기 집 콘크리트 벽에 헤나로 그린 것 같은 꽃 그림도 근사했다.

하지만 벽화는 보통 사람들에게 그만한 그림 실력이 있을 리 없고, 그렇다고 전문 작가를 쓰자니 돈이 무척 많이 든다는 점에서 실현시키기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다면 이 방법은 어떤가? 낡은 칠판을 벽면에 꼭 맞게 잘라 거는 거다. 분필로 그림을 그려도 좋고 수학 공식이나 좋아하는 시 구절을 잔뜩 적어두는 것도 좋다. 게다가 언제든지 다시 지우고 새로 쓰거나 그릴 수 있다는 장점까지 있다. 실제로 예전에 디자이너 정구호는 자신이 관리하는 레스토랑 한쪽 벽면을 그렇게 꾸몄고, 가수 이상은의 아지트라는 홍대 앞의 노보라는 카페도 칠판 인테리어를 활용하고 있다.

혹시 가정집에서 시도해보기에 벽화 장식이 너무 전위적인 안이라고 생각된다면, 나처럼 그림이나 사진 작품을 활용하는 것도 멋진 대안이 될 수 있다. 내 경우 노재운 작가의 디지털 프린트 작품으로 서재 벽면을 마감했고, 거실 벽면엔 나비 모형을 붙여놨는데, 잡지 <메종> 5월호를 살펴보고는 나의 침대 헤드 위 벽면을 초록색으로 페인팅한 뒤 거기에 꽃이나 나비, 새, 심지어 생선이나 돼지, 닭 같은 동물을 적나라하게 찍은 사진 작품을 걸어두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신나는 프로젝트다.

미술 작품을 구입할 정도로 여유 있는 부류가 아니라면 좋아하는 이미지를 디지털 프린트해서 벽지처럼 바르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이 방법은 가장 권위 있는 인테리어 박람회라고 할 수 있는 ‘메종&오브제’(Maison & Objet) 2003년 리뷰 기사를 검토하다가 발견한 안으로, 분홍색 바탕에 신고전주의적 느낌의 여자 얼굴이 아주 커다랗게 마감된 벽면을 보는 순간 나는 “바로 이거야” 싶었다. 한마디로 이게 핫 트렌드다. 게다가 이 디지털 프린트 기법은 천, 종이, 타일, 버티컬 등 다양한 소재 위에 표현할 수 있고, 어느 동네에나 프린트해주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래서 알아보니 소재에 따라 비용도 5만~10만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었다.

아무튼 하루에도 수십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가운데 내가 왜 이토록 ‘벽’에 집착하는지 생각해봤다. 그건 아무래도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에 존재하면서 늘 다른 공간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떠날 수 없는 자가 자기 벽 앞에서 꿈을 꾸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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