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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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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보다 ‘산 자’

등록 2005-03-03 00:00 수정 2020-05-03 04:24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신비화된 여배우의 자살에 현혹되기보단 우울증 마광수에게 응원을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내 친구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은주 얘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너도 한때 이은주라는 배우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냉소적이야?” 하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죽은 사람들한테는 관심 없어. 이런 과잉 관심이 그다지 애도가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너도 제발 입 좀 닥치고 있어.”

나는 얼굴이 벌게졌다. 방금 전에 그에게 저녁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들을 리바이벌하고 있던 터였다. 자살하기 직전에 가수 전인권에게 보냈다는 문자 메시지 얘기였다. “눈이 내리고 있어요. 이 눈이 모든 걸 덮어줄 거예요.” 그런데 결코 고인의 바람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저녁 뉴스를 보면서 알았다. 그녀의 옛 애인은 장례식장에 예전에 고인에게 받았던 십자수 액자까지 들고 나타나서, 내가 당사자라면 사람들에게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을 과거의 사적인 시간과 경험까지 들춰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죽은 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심각한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기어이 살아남아서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 고흐, 버지니아 울프, 로맹 가리, 실비아 플라스, 잭 런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들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 고통을 알지 못하는 치명적인 병, 우울증과 싸우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소피의 선택> 원작자로 알려진 윌리엄 스타이런은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아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던 우울증에 대한 회고록 <보이는 어둠>을 썼다.

사실 <보이는 어둠>을 읽기 전까지 나는 예술가들이 정신적으로 많이 아픈 건 어느 정도 아프길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누구나 철마다 유행을 타듯 우울증을 앓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타이런의 회고록을 읽으며 내 생각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센티멘털한 것인지 알았다. 미스터리하고 불가사의한 고통을 안겨주는 이 병은 원인도 알아내기 어렵고 치료방법도 무척이나 난해한 엄청난 질병이었다. 하지만 스타이런은 주변 사람들의 ‘종교에 가까운 격려’로 정신병원 입원을 결심하고, 집단치료, 미술요법 등을 받으며 자살충동을 서서히 이겨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우울증에 ‘이제 그만 죽고만 싶다’고 호소하던 마광수 교수도 결국 살아남아서 얼마 전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교수 신분으로 쓴 야한 소설들 때문에 지난 10여년간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는데, 그 때문에 <즐거운 사라> 이후 지금까지 줄곧 우울증 약을 복용해왔다. 그리고 그렇게 위독한 상황에서도 맹렬하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그는 얼마 전 무참하게 늙고 기력 없는 백발의 몸으로 나타나 ‘여전히 야한 여자가 좋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신비화해서 이렇게 저렇게 팔아먹는 일에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마광수 선생이 우울증과 검열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예전에 하다가 만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음란 문학’을 완성할 수 있도록 응원이나 하자는 거다.

어찌됐든 우울한 도시보다는 색기발랄한 도시가 더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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