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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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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질투하지 마”

등록 2005-03-10 00:00 수정 2020-05-03 04:24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패리스 힐튼이라는 섹시 아이콘… 재벌가 상속녀가 도발하는 자기긍정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게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미모와 재능에 흠뻑 빠져 있다. 그날도 S는 자기 글에 한껏 도취되어 누군가에게 그걸 자랑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상태였던 것 같다. 결국 사무실에서 또 다른 게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로 자기 칼럼의 일부분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네가 쓴 패리스 힐튼에 대한 글은 너무나 위선적이고 가식적이야. 힐튼 같은 천박한 애를 그토록 미화해놓다니, 솔직히 토할 것 같아. 내가 쓴 걸 읽어줄게. 들어봐. ‘지금 미국 여성들의 모든 관심은 남자들을 다 쓴 생리대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인생의 최고 덕목이 섹스와 돈이라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패리스 힐튼에게 맞추어져 있다. 남자들에게 무한한 성적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옷차림은 어딜 봐도 백만장자의 우아한 상속녀와는 거리가 멀다. 동화 속의 신데렐라는 가련하게 왕자를 기다렸지만 세상에 부러울 것이라고는 없는 이 상속녀께서는 직접 남자들을 왕자님으로 둔갑시켜주면서 하루에도 세 차례나 파트너를 바꾸는 아찔한 데이트를 즐기며 <피플>지 같은 타블로이드판 매출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어때? 패리스 힐튼의 매력에 대한 이보다 더 정직하고 예리한 글이 또 있겠어? 그런 점에서 ’게스’에서는 고마워해야 한다고.

‘힐튼 호텔’의 상속녀이며, 섹시하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유행을 선도하는 ‘트렌드 세터’이며, 엄청난 남성 편력과 섹스 비디오 파문으로 지난해 매스컴이 가장 사랑한 유명인사로 떠오른 패리스 힐튼에 대한 얘기다. 최근에는 가장 미국적인 브랜드로 알려진 ‘게스’의 모델이 되면서 타블로이드 신문보다 패션지에서 더 주목받고 있는데, 나로서는 무엇보다 패리스 힐튼을 향한 사람들의 이중적 시선이 무척이나 재밌게 느껴졌다.

또 다른 예로 이번달 <바자>에는 패리스 힐튼이 ‘Don’t Be Jealous’라는 글자가 박힌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진이 실렸는데, 그 옆에 담당 패션 에디터는 “걱정 마요, 패리스! 우리는 당신을 전혀 질투하지 않아요”라는 코멘트를 달아놓았다.

사실 그전까지 나도 패리스 힐튼을 조금도 질투하지 않았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그녀처럼 살고 싶다는 여자들을 한심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조롱받아 마땅한 그 천박한 티셔츠의 문구를 보는 순간부터 느닷없이 패리스 힐튼이 좋아졌다. 재벌가의 상속녀 신분으로 고급 창부처럼 입고 행동하며 ‘마녀사냥’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질투하지 마.”

나로서는 적어도 패리스 힐튼이라는 여자의 그 자율성과 자기긍정성만큼은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속녀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에서 자신은 “힐튼가의 딸이 아니라 그냥 패리스로 알려지길 원한다”고 말했다는데, 말하자면 그녀는 그것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여자들이 패리스 힐튼을 부러워하면서도 싫어하는 이유는 아무 곳에서나 도발적인 옷차림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또 쉽게 파트너를 갈아치우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천박하고 저속해 보인다는 거다. 하지만 그게 독이든 약이든, 그 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도 말하지 않았나. “유혹은 여성의 주권을 회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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