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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의 친구는 어디에 있는가

<두만강> <댄스타운> <무산일기> 탈북자 영화들, 탈북의 ‘스펙터클’에서 ‘내부 타자’의 시선으로
등록 2011-04-08 16:32 수정 2020-05-03 04:26

전승철은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초기정착시설인 하나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를 돌봐주는 박 형사는 같이 취업을 알아보러 가며 그를 가볍게 구박한다. “머리 아직도 안 잘랐어? 언제 자를 거야?” 전승철은 바가지 머리를 항상 숙이고 있다. 면접은 순조롭다. 단지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돕는 데 제공하는 비용이 터무니없이 낮은 것에, 사장과 박 형사 간에 사소한 실랑이가 벌어진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을 복사하는 순간, 사장은 취업을 거절한다. “125로 시작되는 사람 비자가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거절을 하는 순간 보이는 뒷모습의 전승철은 대접받은 커피잔을 닦고 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 그의 다짐은 번번이 좌절한다. 전승철의 주민등록번호의 일부인 ‘125’는 탈북자라는 꼬리표다(이 번호는 영화적 각색이다. 실제론 하나원이 있는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의 지역코드인 252라는 숫자가 포함된 주민등록번호 탓에 탈북자 출신임을 숨길 수 없다).

‘탈북자 영화’는 남한 주도의 통일 이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구실을 한다. 탈북자는 ‘먼저 온 미래’다. 왼쪽부터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 장률 감독의 <두만강>, 전규환 감독의 <댄스타운>.

‘탈북자 영화’는 남한 주도의 통일 이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구실을 한다. 탈북자는 ‘먼저 온 미래’다. 왼쪽부터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 장률 감독의 <두만강>, 전규환 감독의 <댄스타운>.

투명인간이 된 탈북자

그는 주민등록증 따위는 필요 없을 포스터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붙인 포스터는 구역의 다른 사람이 떼버린다. 붙이는 현장이 발각될 때는 몰매도 맞는다.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남자는 그런 그를 비난하고, 인도도 없는 아슬아슬한 차도에 플래카드를 붙이거나, 애초 약속에 없는 명함 나눠주는 일을 시킨다. 승철에게도 은밀한 기쁨이 있다. 일요일마다 같이 사는 경철의 옷을 빌려 입고 교회에 가면 성가대의 숙영을 볼 수 있다. 숙영이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노래방에서 일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곳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한다. 하지만 숙영은 교회에서 그를 알아보고는 “나를 알은체하지 말라”고 말한다.

4월14일 개봉하는 는 ‘탈북자 전승철’이라기보다는 ‘투명인간 전승철’에 관한 이야기다. 승철이 알은체를 하기 전 숙영은 그가 교회에 같이 다니는지도 모르고, 그가 데려다주려 하자 “상관 말고 가시라”고 한다. 도로에서 플래카드 붙이는 그의 옆을 차들은 바싹 지나친다. 같이 사는 경철은 그가 있든 없든 섹스를 나누고, 경철의 여자친구는 빨래를 하는 그의 옆에서 오줌을 눈다.

옆에서 그를 돌봐주는 박 형사는 친구를 못 사귀는 그를 교회에 데리고 간다. 그 자리에서 승철은 탈북한 사연을 들려준다. 친구랑 먹을 걸 가지고 싸움이 붙었다. 다음날 친구의 그 자리를 지나치는데, 친구는 그 자리에 여전히 누워 있었다. 박 형사는 친구 하라고 데려왔더니 누가 살인자랑 친구하겠느냐고 하고, 전승철은 “친구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 박 형사는 “친구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말한다.

승철은 고백에서 북의 ‘동무’를 한국에서 통용되는 ‘친구’로 바꾸었을 것이다. 김영민은 (한겨레출판 펴냄)에서 동무와 동지, 친구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대의가 푯대라면 그 푯대 아래 모이는 것”이 동지요, “이론이 부재한 자리를 정서적 일체감이 들물처럼 채우는 사적 우연성”이 친구다. 동무는 “동무(同無)”다. “서로 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르거니 함께 걷는다.”

이 언어의 차이는 체제의 차이일지 모른다. 동무가 친구로 번역된 자본주의 대한민국은 그를 ‘동무’라 할 생각이 없다. 같이 사는 경철을 배신한 뒤, 승철은 머리를 깎고 옷을 사 입고 교회를 가고, 승철은 성가대 옷을 입고 자리에 앉는다. 열심히 살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내면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항상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답은 없다. 체제가 만들어낸 ‘차이’가 있을 뿐이고, 탈북자들은 그 차이를 없애기 위해 피를 묻혀야 한다.

조국은 남자의 발명품

3월17일 개봉한 은 ‘동무의 우정’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로, 장 감독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스토리다. 배경은 북한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옌벤 조선족 자치주 투먼. 겨울이면 얼어붙은 강을 지나 북조선 사람들이 건너온다. 탈북자가 많이 넘어오면서 마을의 양들이 없어지고 말리던 명태도 다 바닥에 떨어졌다. 이장은 보상금을 걸며 그들을 보면 신고하라고 한다. 마을은 과격파와 온건파로 나뉜다. “사람이 굶다 보면 지 에미·애비도 팔아먹는다는데, 그쪽 사람들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고 말하기도 하고, 양을 훔쳤다며 탈북자 아이를 때리는 조선족 아이들에게 양 주인은 “양이 뭐기에 사람을 그렇게 때리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조선족(재중동포) 창호와 탈북자(북조선 사람) 정진은 우정을 쌓고 회복한다. 창호는 평양까지 갔다 온 축구 선수 정진에게 마을 간 축구시합에 나와달라 했고, 정진은 험악한 분위기로 바뀐 마을을 떠나면서도 약속은 꼭 지키겠다고 한다.

은 ‘조선말’로 하지만 ‘한국말’ 자막이 깔린다. 자막 그대로 그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에메나이’ 등의 단어, ‘저찌그라우’ 등의 단어가 한국말로 번역된다. “많이 굶어죽었다는데 정말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오는 “우리 ‘아들’은 그런 거 몰라도 된다”라는 자막은 ‘아이들’을 ‘아들’로 잘못 번역했을 것이다. 자막으로 번역되는 한국말 사이에 60년의 세월이 누워 있다. 그에 비해 창호와 정진은 굶느냐, 굶지 않느냐의 차이를 극복해 대화할 수 있다.

조선족 동네에는 젊은이들도 일할 데가 없어 외상술을 마신다. 명태 말리는 것이 일거리의 다다. 일할 만한 사람들은 한국으로 돈 벌러 갔다. 창호 어머니는 허리병으로 고생하며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동네 상점에 살러 온 아이의 부모는 일하던 한국 공장에 불이 나서 타 죽었다. 가난하지만 고향을 ‘저쪽’(북조선)이라고 여기는 조선족 사람들과 조선족 마을로 먹을 것을 찾으러 가는 이 모두 ‘한국’의 이방인이다.

전규환 감독 ‘타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6월 개봉 예정)에서 ‘친구’라는 말은 속이는 말이다. 은 탈북여성의 한국 생활기다. 북조선에서 리정림(라미란)은 아이를 못 낳는다고 이혼당하고, 무역상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 남편은 북에서는 보기 어려운 화장품, 비디오테이프 등을 그녀에게 갖다준다. 당국에 걸려 위기에 처한 남자는 정림에게 도망칠 루트를 마련해주고 뒤따라가겠노라 한다. 한국으로 넘어온 그녀는 한국 정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산다. 정림은 남편이 총살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열한다. 그녀와 술을 마시며 “우린 친구”라고 연거푸 말하는 경찰관은 정림을 겁탈한다.

리정림은 “조국은 남자의 발명품이며 여자에게 조국은 없다”(김영민, )는 명제를 실현하는 인물로 보인다. 이념을 위해 탈출한 것도 생존을 위해 탈출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온 한국은 남편이 없는, 사랑이 없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일 뿐이다.

탈북자, 21세기의 내부 난민

등은 이전의 탈북자 영화들과 많이 달라졌다. (2008), (2005)의 주인공은 힘든 탈북 과정을 견디는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 어디에도 영웅은 없다. 대신 탈북자의 삶을 조용히 응시한다. 1990년대 탈북자 러시가 뉴스를 통해 전해진 뒤, 2000년대 이들은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이주했다. 이제 한국인에게 ‘탈북’이라는 스펙터클은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주위에서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조선족과 구분되지 않는 이들로. 영화평론가 황진미는 “탈북자의 삶이 이동 중인 상태, 드라마틱한 상태가 아니라, 내화된 상태가 되었다. 이제 탈북자는 내부 난민”이라고 말한다. “이전 탈북자 영화의 영웅은 이제는 티가 안 나기를 바라는 비가시화된 인물로 변했다. 그들은 피부색이 같은 이주노동자다.”

2005년 인권위원회에서 만든 에 있는 ‘가방을 멘 소년’(정지우 감독)에는 말을 못하는 척하는 탈북자 소년이 등장한다. 말만 하지 않으면 그는 한국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말을 하면 모두들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북한 말투 때문이다. 그의 생존법은 탈북자와 있을 때만 말을 하는 것이다. 2007년에 완성돼 2009년 개봉한 (김동현 감독)은 탈북자 진욱이 베트남에서 온 이주노동자 팅윤의 애인을 찾아 함께 떠나는 영화다. 팅윤은 한국말을 몰라 ‘부안’으로 가야 할 걸 ‘부산’행 버스를 탔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진욱은 이불을 사러 나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을 잃어버린다. ‘한국어’의 도움을 주고받는 그들은 같은 이방인 처지다. 지난해 개봉한 에서 북한이 버린 정보원 지원(강동원)은 ‘도망간 외국인 며느리’를 찾으러 다니는 한규(송강호) 옆에서 외국인 며느리 편을 든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 의 탈북자 영화가 연민에서 경쟁 상대로 바꿔 바라보고, 이물감을 느끼는 현재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에서 한국인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탈북자를 부러워한다. 에서 승철의 친구 경철은 탈북자가 번 돈을 북한으로 부치는 브로커 일을 한다. 이주노동자가 돈을 벌어 고향으로 보내듯이. 한국인은 탈북자를 우리 세금을 들여 먹여살리는 사람으로 바라보고, 통일 비용으로 우리가 불행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결국 우리 이야기일지도

감독 박정범은 영화에서 주인공 전승철로 출연한다. 전승철이 나오는 전작이 있다. 이다. 박정범 감독에게는 실제로 전승철이라는 탈북자 친구가 있었다. 그 형이 대학의 같은 과를 다녔고, 동생 승철과는 영화를 보러 다니며 어울렸다. 전승철은 위암으로 고생하다가 박 감독이 을 완성한 이틀 뒤 죽었다. 승철에게 영화를 보여주진 못했다. 모르핀을 너무 많이 받은 상태였다( 797호 감독 인터뷰 참조). 영화는 뒷모습을 유독 많이 보여주는데, 이를 이영진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카메라가 승철의 등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감독이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으려는 다짐처럼 보인다. 동시에 카메라를 따라 승철의 뒤를 밟으면서 가 한 탈북자의 사연이 아닌 우리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앞의 같은 호 인터뷰 질문) 최근의 탈북자 영화는 탈북자가 ‘투명’을 걷고 우정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 손을 마주 잡을 이는 아마 같은 처지의 가난한 이들일 것이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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