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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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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아는 남자가 좋다

등록 2004-09-24 00:00 수정 2020-05-03 04:23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행사치레용 호접란과 장미 백 송이를 꽃의 ‘전부’로 알고 있다면…

▣ 김경/ 패션지 피처 디렉터

오래 쉬다가 첫 출근 하는 선배가 있어서 꽃을 보냈다. 마침 회사 근처에 괜찮은 플라워 숍이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꽃들을 직접 골랐다. 개인적으로 섬세하고 연약해 보이면서도 소박한 느낌이 드는 꽃을 좋아하기 때문에(원래 나처럼 드세 보이는 여자들이 반대로 그런 꽃을 좋아한다), 플로리스트에게 ‘보라색 리시안셔스에 하얀색 왁스 플라워(우리나라 함박꽃처럼 정말 예쁘고 소박한 꽃이다!)와 연한 녹색잎의 유칼립투스를 섞어서, 작아도 좋으니 2만원 정도에 맞추어 달라’고 주문했다. 플로리스트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15분여 만에 만들어준 꽃다발은 내 스스로 취할 정도로 너무 예뻤다. 너무 예뻐서 돈을 지불하면서도 연신 웃음이 나왔다.

그 다음날 내게 꽃선물을 받은 선배가 점심을 사겠다고 해서 만났더니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여러 곳에서 꽃이 왔는데 니가 보내준 게 제일 예쁘더라. 서명 안 해도 누가 보내준 건지 대번에 알겠던데.” 그러면서 우리는 K상무 흉을 봤다. 어떻게 패션지 광고 일을 하는 사람이 패션지 데스크로 7년 동안 일하며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사람에게 허접하게 ‘호접란’ 같은 걸 보낼 수가 있나? 실제로 그가 보낸 꽃은 내가 보낸 것보다 서너배나 비쌌지만 그는 그걸 보내놓고도 욕을 먹고 있었다. 호접란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대한민국 사람들 열이면 아홉이 발령이나 인사, 개업 축하용 화환으로 모두들 똑같은 걸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받는 사람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고 그저 형식적인 ‘출석체크’ 내지는 ‘일수찍기’나 하자는 의도처럼 보이기 때문에 받고도 기분이 나쁘다.

언젠가 한번은 생일을 맞은 한 후배가 사무실에서 남자친구가 보낸 장미 백 송이를 받고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면서 “와” 하고 부러운 듯 쳐다보는 동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어휴, 제 남자친구 안목이 이렇다니까요. 좀 촌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귀여운 데가 있으니까 봐주세요. 이보세요. 분홍색 리본에 ‘○○야 사랑해’라고 적혀 있은 거, 좀 정스럽죠?” 그러고는 장미 백 송이는 화병에 꽂아 회의실에 갖다놓은 뒤 자기는 그 리본만 챙겼다.

물론 꽃집이라고 가봐야 열이면 아홉이 만날 그 나물에 그 밥만 팔고 있는 것도 문제다. 모두들 장례식이나 개업식에 보내질 화환 만들기에 정신이 팔려 있고 냉장고에는 흔해빠진 빨간 장미와 안개꽃밖에 없는 곳이 허다하다.

문제는 일본이나 유럽 같은 곳에서는 꽃 사는 일이 일상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행사치레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플로리스트가 많아져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에 꽃을 즐기지 못하면 고급 꽃 문화라는 건 그저 외국물 좀 먹고 파티 좋아하는 돈 있는 자의 호사스러운 취미에 불과할 뿐이다.

요즘은 딱히 플로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꽃을 즐기는 여자들이 내 주변에 꽤 많아졌다. 친구들이랑 자정까지 와인을 마시고 새벽 2시에 양재동 꽃시장에 가는 취미가 있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소선이 그렇고, 일주일에 한번 꽃을 꽂지만 꽃은 배울 필요가 없고 그저 내키는 대로 꽂으면 된다고 말하는 패션 디자이너 박지원이 그렇다. 그런가 하면 모델 변정수는 알마 마르소라는 플라워스쿨에서 정식으로 꽃을 배운 뒤 마치 다도하는 기분으로 꽃을 꽂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남자들은 여전히 호접란과 장미꽃 백 송이밖에 모른다. 확실한 건 더 감각적인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꽃이나 나무에 대한 감식안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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