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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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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일하고 덜 받는 노동자들

등록 2003-08-28 00:00 수정 2020-05-03 04:23

노동조합이 지나친 임금인상을 요구한다고?…노동생산성·노동소득분배율로 따져본 고임금의 진실

현대자동차 고졸 생산직 노동자가 연간 165일을 놀면서 연봉 6천만원을 받는다?(현대자동차노조에 따르면, 근속연수 14.4년인 생산직 노동자가 실제로 연봉 6천만원을 받으려면 165일을 쉬기는커녕 일요일을 포함해 단 하루도 놀지 않고 무려 500일(!)을 일해야 한다.) 한국의 제조업 노동자들이 노동생산성보다 훨씬 더 높은 임금을 받고 있다? 노동조합의 ‘지나친’ 임금인상을 비판하는 주장이 최근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제조업 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임금수준은 과도한 것인가 임금은 과연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외환위기 이전 수준조차 안된다”

임금증가율이 너무 높은지 혹은 낮은지를 판단하는 대표적인 지표로 노동생산성과 노동소득분배율이 있다. 먼저 노동생산성(노동자 1명이 시간당 생산해낸 산출물의 양)을 보자. 사용자쪽은 “우리나라의 임금은 줄곧 생산성 증가율을 앞질러왔고, 이것이 기업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생산은 적게 하면서 임금인상 투쟁으로 더 많이 가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부소장의 분석(자료: 한국은행 국민계정,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소비자물가조사)에 따르면, 2002년에 명목임금 증가율은 3.0%로 명목생산성 증가율(5.2%)을 훨씬 밑돌았다. 물가상승을 감안한 실질임금 증가율(0.3%) 역시 실질생산성 증가율(3.5%)에 훨씬 못 미친다. ‘생산성 증가율을 앞지르는 지나친 임금인상’ 주장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실질노동생산성 증가율과 실질임금 상승률을 견줘봐도 마찬가지다. 실질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998년 -0.7%, 1999년 9.0%, 2000년 4.9%, 2001년 1.1%, 2002년 3.5%로 나타난 반면, 실질임금 증가율은 1998년 -4.7%, 1999년 0.8%, 2000년 1.1%, 2001년 2.7%, 2002년 0.3%로 나타났다. 2001년만 빼고 해마다 실질임금이 노동생산성보다 더 적게 오른 것이다. 여러 통계수치들이야 복잡하고 메마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진실은 풍부하다. 김 부소장은 “지난해 노동자 1인당 월 평균 실질임금(147만5천원)이 1996년 수준(149만4천원)을 밑돌아 아직 외환위기 이전 수준조차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며 “생산성에 못 미치는 낮은 임금인상으로 인해 노동소득분배율도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소득분배율은 한 나라의 경제가 창출해낸 총소득(국내총생산·GDP) 중에서 노동자 총임금(평균임금×노동자수)이 차지하는 비율로, 총산출 가운데 노동이 가져가는 몫을 뜻한다. 만약 취업 노동자 수가 증가하고 생산성을 웃도는 임금인상이 이뤄졌다면 노동소득분배율이 개선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은행 국민계정을 보면, 노동소득분배율은 1996년 64.2%를 정점으로 2000년 59.4%까지 계속 하락한 뒤 2001년에 62.0%로 다소 개선됐지만 2002년에 또다시 60.9%로 하락했다. 한국 노동자들이 ‘더 많이’ 생산하고 ‘더 적게’ 임금으로 가져간다는 사실이 여기서 한눈에 드러난다. 참고로, 선진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은 대체로 70%대에 이른다. (기업이 이윤으로 가져가는 몫과 비교해볼 때) 한국 노동자들이 임금으로 분배받는 몫이 선진국보다 더 적다는 것인데, 이는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의 상대적 빈곤이 커지고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증가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임금은 반드시 노동생산성에 따라 결정돼야 하는 것일까? 사용자쪽은 ‘생산성 임금’, 즉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생산성이 낮은 노동자는 더 적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계는 생산성 연동 임금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생계임금’ 혹은 ‘사회적 임금’을 요구한다. 노동자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생계비) 및 사회복지 수준에 맞춰 임금이 결정돼야 한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사회복지 수준이 낮은 만큼 한국의 노동자 임금은 지금보다 오히려 더 인상돼야 한다.

덧붙여, 생산성 임금론이 일정하게 설득력을 얻으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노동생산성이 전적으로 노동자들의 노력에 달려 있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노동력의 질(인적자본) 외에도 기술진보, 설비투자 수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노동생산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술수준이라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1973년 이전에 미국에서 노동생산성 증가의 3분의 2 이상은 기술진보에서 비롯되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럼, 설비투자는 어떨까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설비투자율은 10.4%로, 1999년 2분기(10.3%)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올 2분기 설비투자는 1분기에 비해 -2.5% 더 감소했다. 기업의 설비투자가 줄어들면 노동자가 가동할 수 있는 기계가 감소하고, 오래되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기계를 가동시켜야 한다. 따라서 노동생산성은 당연히 둔화될 수밖에 없다. 노동생산성 저하는 노동자들이 놀고먹으려 해서 또는 노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이 기술개발과 설비투자를 게을리한 탓이 크다. 한국에서 임금상승률이 노동생산성 증가율을 웃돈 적도 없지만, 재계가 노동생산성 지표를 앞세워 임금인상을 비난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노조의 임금효과도 미미해

그렇다면 노동조합이 임금상승에 미치는 효과(이른바 ‘노조의 임금효과’)는 얼마나 될까? 사용자쪽은 강한 노조의 파업 위협과 압력 때문에 노조 조합원들이 시장에서 형성되는 적정 균형임금보다 훨씬 더 높은 임금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노조가 있는 사업장의 노동자는 비노조 동종 사업장의 노동자에 비해 임금을 15∼20%가량 더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한국에서 노조의 임금효과는 10% 정도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노조가 있다고 해서 꼭 임금이 높고, 노조가 없다고 해서 임금이 낮은 것도 아니다. 무노조 기업의 경우 노조 결성을 막기 위해 다른 노조 사업장보다 더 높은 임금을 주기도 한다. 무노조 삼성그룹 노동자들의 임금이 비교적 높은 배경에는 이런 의도가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할 대목은 한국에서 노조와 비노조 사업장의 임금격차는 외환위기 이전인 1997년까지 ±1∼2%(노조 사업장의 임금수준이 비노조 사업장보다 더 적은 경우도 있다)로 미미한 차이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노동경제학에는 ‘효율임금’이란 개념이 있다. 기업이 시장균형 임금보다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하면 이것이 노동자 열의를 진작시키고 이직률을 낮춰 생산성이 높아지고 기업 수익성도 증가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들은 효율임금은커녕 임금을 최대한 깎아 기업 이윤을 늘리겠다는 전근대적 사고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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