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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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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을 등쳐먹는 나라?

등록 2003-11-21 00:00 수정 2020-05-03 04:23

공적자금 상환 · 국민연금 지급 등 앞 세대를 위해 후손들이 엄청난 부담 떠맡아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옛말이 있다. 당장 지불할 필요가 없다면, 사람은 무리한 소비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얘기다. 그런 소비의 결과는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나빠진다고 해도 부모가 진 빚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지는 않는다. 우리 민법은 자식이 부모의 재산 상속을 포기하면 부모의 빚을 갚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가족 차원의 얘기다. 사회 전체로는 ‘상속 포기’가 인정되지 않는다. 앞당겨 쓴 돈은 결국 누군가가 갚아야 한다.

공적자금 18.5% 10대 이하 부담

우리 경제가 고속성장을 하던 시대에 국민들은 정말 허리띠를 졸라맸다. 세계적으로도 두드러질 정도의 높은 저축률이 이를 보여준다. 높은 저축률은 보이지 않는 강제가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어쨌든 높은 저축률은 높은 투자율로 이어졌고, 그것이 초고속 경제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현 세대가 누리는 풍요에는 앞선 세대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외환위기를 계기로 확실히 역전되고 있다. 현 세대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무지막지한 경제적 부담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후손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대표적 사례는 정부가 빚을 내어 돈을 쓰는 일이다. 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므로, 정부의 빚은 결국 국민들에게 세금 부담으로 돌아온다. 정부가 지금 빚을 내어 쓰고 나중에 갚는다면, 그 빚을 갚을 때 일하는 세대가 부담을 떠안게 된다. 정부는 외환위기로 부실금융기관에 160조원을 투입했다. 이를 위해 예금보험공사가 채권을 발행해 돈을 조달하고 정부가 이를 보증했다. 이 중 얼마를 회수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손실을 본 만큼은 결국 정부가 다시 세금을 거둬 메워넣어야 한다.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는 지난해 8월 공적자금 상환 계획을 수립했다. 투입한 공적자금 중 49조원을 앞으로 25년간 매년 2조원씩 갚아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환 계획이 후손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한국금융연구원 박종규 연구위원은 “상환 계획에 따르면, 지금의 10대가 13.5%, 10살 미만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가 4.7%를 부담하는 등 외환위기에는 아무런 책임도 없고 현재 투표권조차 없는 세대가 전체의 18.5%를 떠안게 된다”고 말했다. 가장 부담이 큰 세대는 현재의 20~30대로 전체의 절반이 넘는 55.9%를 부담하게 된다.

물론 정부 빚을 무작정 앞당겨 갚는다고 해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서둘러 빚을 청산하려면 그만큼 세금을 더 걷거나 세출을 줄여야 하는데, 여기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후손에게 지나친 부담을 전가하지 않으면서 경제에도 큰 부담을 주지 않는 상환 방법은 없을까? 박 연구위원은 상환 기간을 10년으로 줄이고 세대간 부담률을 계산했다. 10년에 걸쳐 49조원을 갚으려면 연간 부담은 5조원이다. 25년에 걸쳐 상환하는 것보다 연간 3조원씩 더 든다.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다. 하지만 세대간 부담에는 큰 변화가 생긴다. 20~30대의 부담은 53%로 25년 상환 때보다 조금 낮아진다. 현재 미성년자들의 부담은 18.5%에서 4.6%로 줄어든다. 대신 50대의 부담이 25년 상환 때의 5.2%에서 11.5%로 늘어난다. 어느 쪽이 더 합당한가?

노령자 부양하는 젊은 세대 점점 줄어

후손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또 다른 사례로 ‘연금제도’를 들 수 있다. 초기 가입자에게 많은 액수의 보험금을 보장하는 연금제도는 자칫 ‘폰지게임’이 될 수 있다. 폰지게임이란 1920년대 미국에 개발붐이 일 때 부동산 개발을 통해 고수익을 보장한다며 투자자들의 돈을 모은 찰스 폰지란 사람의 사기극에서 유래한다. 폰지는 실제 사업은 하지 않고 뒤에 투자한 사람의 돈으로 앞서 투자한 사람에게 수익금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다. 이런 사기극은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줄어들면 곧 파산한다. 연금제도도 자칫하면 폰지게임이 된다. 연금지급액이 훗날 들어올 연금보험료 수입에 비해 너무 많으면 연금제도는 유지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제도는 도입 초기부터 설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훗날 들어올 연금보험료 수입에 비해 보험금 지급액이 너무 많게 책정된 탓이다. 정부는 연금 지급 개시 연령을 뒤로 늦추고 보험금 지급액도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이에 대해 노동계의 반발이 크다. 연금지급액을 줄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동계의 대안은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라는 것이다. 세금은 부유한 사람이 많이 내고, 연금보험료는 소득에 비례한다. 따라서 그렇게 하면 소득재분배 효과는 생긴다. 하지만 앞 세대를 위해 후손에게 엄청난 부담을 떠넘긴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 세금은 어차피 후손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는 단지 조금 더 고통스러울 뿐일까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인구 고령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편이고, 현재 추세대로라면 2025년 이후부터 인구가 줄어든다. 일을 하기 어려운 노령인구는 늘어나는데, 이들을 부양할 수 있는 젊은 세대는 점차 줄어드는 데 따른 문제가 곧 닥친다. 박종규 연구위원은 “인구 구조의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총소득은 2004년을 1000으로 할 때 2016년 1068(현재 가치를 기준으로)로 정점을 이룬다. 이후 계속 하락해 2028년에는 976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추산했다. 현 세대가 떠넘긴 부담을 아예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다가 현 세대는 어린 자식의 미래를 담보로 걸고 외상으로 소를 잡아먹은 아버지로 후손에게 기억될지 모른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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