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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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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는 억울하다

등록 2003-12-11 00:00 수정 2020-05-03 04:23

임금과 물가상승의 주범으로 몰아붙이기 어려워…임금 불평등을 오히려 줄이는 효과도

한국은행이 12월2일 ‘2000년 산업연관표를 이용한 물가 파급효과 분석’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산업분야에서 임금이 10% 변동할 경우 소비자물가는 3.0% 변동 압력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여러 가지 비용요인이 각각 10% 변동할 경우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단연 임금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요금(1.9%), 원화환율(1.8%), 집세(1.31%)가 그 뒤를 이었다.

기업이 통제 불가능하다고

한국은행은 “기업의 투입/산출 구조에서 인건비가 제품값 상승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분석한 것으로, 2000년의 경우 전산업 임금상승률이 7.3%였으므로 이런 임금상승이 물가를 2.2%(7.3×0.3) 인상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은 이어 “결국 물가불안 요인을 최소화하려면 합당한 수준에서 임금인상이 절실하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굳이 한국은행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툭하면 “노동조합 때문에 기업 못해먹겠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노동조합이 걸핏하면 파업을 벌이고, 해마다 과도한 임금인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임금폭발’(경쟁적 임금인상)이 한국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과연 노조 때문에 못해먹겠다는 말은 진실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선전에 불과한 것일까?

만약 노조가 ‘통제 불가능한’ 골칫거리라면 기업은 공장 울타리 밖으로 노조를 내보내려고 할 것이다. 현행 기업별 노조 대신 산별 노조체제를 더 선호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용자들은 대체로 산별 교섭체제로의 전환을 기피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기업이 공장 ‘안에서’ 임금인상 문제 등을 둘러싸고 노조를 충분히 통제·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조의 힘이 세다고 해서 지불 능력을 넘어 무리하게 임금을 올려주는 기업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럴 바에야 아예 공장문을 닫아버릴 것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김성희 부소장은 “사용자들이야 노동생산성을 따지지만, 임금이 딱히 얼마여야 한다는 적정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과도한 임금인상을 판단할 근거도 없다”며 “기업이 충분히 줄 만한 범위를 설정해놓고 그 안에서 노동조합과 적당히 절충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졸 생산직 연봉 무려 6천만원”이란 논란이 보여주듯,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로 늘 비판받아온 현대자동차를 보자. 현대차는 고임금 논란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사상최대 실적을 올리고 있다. 현대차노조 박유기 사무국장은 “노조가 결성된 지난 1987년 회사 매출액은 2조8천억원, 순이익은 500억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해는 매출액 30조원에 순이익 2조원을 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며 “1년도 안 쉬고 파업을 해왔는데 역설적으로 회사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노동조합이 임금상승에 미치는 효과(이른바 ‘노조 임금효과’)는 얼마나 될까? 노동조합이 파업 위협과 단체교섭력을 무기로 시장 균형임금보다 더 높은 임금을 따내는 현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1999년 미국 노동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제조업 조직노동자(노조 조합원)의 주당 평균임금은 603달러로 미조직노동자(노조 없는 노동자)의 주당 평균임금(532달러)보다 13.3%나 높았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지난 2월에 내놓은 ‘노조와 단체교섭: 글로벌 환경에서 경제적 효과’ 보고서에서 각국 1천여개 사업장 사례를 분석한 결과, 미국의 조직노동자들은 미조직노동자보다 15% 정도 많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다른 선진국에서는 5∼10% 정도 임금격차가 나타난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조 임금효과는 10% 정도라는 게 대체적인 실증 연구결과이다. 물론 이런 임금격차에는 노동자의 나이, 성, 인종, 교육수준, 생산성 차이 등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순수한’ 노조 임금효과만을 뽑아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노조가 노동자 사이의 임금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일까? 대기업 조직노동자들은 노조 없는 노동자들을 고려해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하는가? 세계은행 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노조가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임금격차를 줄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노조 조직률이 높을수록 노동자간 소득 불평등이 개선되고 낮은 실업률과 높은 생산성을 낳는다는 것이다.

임금이 먼저냐 물가가 먼저냐

이처럼 노조 임금효과는 노동시장의 임금 불평등을 높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낮추기도 한다. 노동조합이 노동시장에서 임금 불평등도를 6.3%가량 낮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1992년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노조가 시장의 임금 불평등도를 7.1∼17.3%까지 줄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대기업 노조 사업장이 임금을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현대자동차에서 임금이 인상돼야 다른 중소·하청사업장에서도 이에 맞춰 일정한 임금인상이 이뤄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노조 위협효과’다. 일부 무노조사업장의 사용자들은 노조 결성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조직노동자의 임금 수준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은 임금을 주기도 한다. 전략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시장임금보다 더 높은 임금을 주는 것이다.

다시 임금과 물가 얘기로 돌아가보자. 임금과 물가의 상관관계 및 인과관계를 추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부소장은 “노조가 올해 임금인상을 요구할 때 지난해 물가상승률을 기본 자료로 제시하기 때문에 임금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거꾸로 물가가 임금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의 2000년도 분석에서 임금상승이 물가를 변동시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그 뒤 집값이 폭등했기 때문에 집값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임금보다 더 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물론 집값 상승은 다시 임금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노동조합이 ‘전투적 경제주의’를 통해 지나치게 많은 몫을 가져가 한국 경제를 말아먹고 있는 것일까? 다른 변수를 제외하고 오직 임금만이 물가인상을 낳는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특정 혹은 몇몇 사업장’에서만 임금인상이 이뤄지면 해당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오른다. 그러나 다른 경쟁기업들까지 뒤따라 임금을 높이면 결국 물가상승으로 이어져 명목임금은 올라도 실질임금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삭감되고 만다. 게다가 자본은 임금이 인상돼도 이윤을 한푼도 줄이지 않고 모든 임금인상분을 고스란히 제품가격에 전가하기 일쑤다.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현상유지를 위한 성격이 크고, 정작 물가를 올리는 쪽은 기업이란 얘기다.

포드자동차의 헨리 포드는 ‘일당 5달러’라는 고임금으로 노동자들의 생산성 향상을 도모했는데, 그는 생산뿐 아니라 ‘대량소비’에서 자본축적의 비밀을 터득했다. 자본의 이윤 축적 조건인 소비 증가를 위해서라도 임금인상은 나쁠 게 없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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