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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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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엄두 못내고, 사느냐 죽느냐…

등록 2002-12-19 00:00 수정 2020-05-03 04:23

하이닉스

채권단만 바라보는 하이닉스…처리방안 확정되지 않은 채 차기정권으로 넘어가는가

지난 12월12일 낮, 경기도 이천 하이닉스반도체 공장.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부인 한인옥씨가 한나라당 관계자들과 함께 갑자기 공장을 방문했다. 선거운동 차 들른 것이다. 한씨는 구내식당에서 하이닉스 종업원들과 만나 “하이닉스 정상화를 위해 최대한 돕겠다”며 이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후보는 하이닉스 처리에 대해 “무조건적 해외처분보다는 선 정상화로 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시간과의 숨가쁜 싸움

같은 시각, 하이닉스노동조합 정상영 위원장은 서울에 올라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경제특보를 만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노조와 민주당은 하이닉스는 정상화가 우선돼야 하고, 매각은 나중 문제라는 선에서 의견을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가 갑자기 민주당을 찾아간 데는 “부실기업을 퇴출하는 시장시스템을 상시화하겠다”는 노 후보의 발언에 대한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 위원장은 “대선 국면을 맞아 하이닉스 처리를 둘러싸고 다들 관망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대선을 활용해 향후 하이닉스 처리와 관련해 미리 못박아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매각 재추진이냐 독자생존이냐를 따지기 전에 시장에서 고개드는 청산론부터 정치적으로 잠재워놓겠다는 것이다.

두 풍경은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의 매각협상이 헐값매각 논란 속에 무산된 뒤 여전히 생존이 위태로울 지경에 놓인 하이닉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하이닉스 회생을 위한 채권단 구조조정 방안은 지난달 말에 이미 나왔다. 재매각을 추진하되 눈앞에 닥친 자금난으로부터 숨통을 터주기 위해 부채(약 6조원) 가운데 1조9천억원을 출자전환하고, 나머지 여신은 2006년까지 만기연장한다는 것이다. 경영 정상화와 매각을 병행 추진하되, 하이닉스를 사겠다는 마땅한 바이어가 없는 만큼 ‘선 정상화 후 매각’으로 가는 구상이다. 숨 넘어가는 하이닉스는 이런 구조조정안이 나오면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 연간 4천억∼5천억원에 이르는 금융비용을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방안이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120개에 이르는 채권금융기관들의 동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채권단 결의 여부는 불투명하다. 하이닉스 전체 채권의 37%를 떠안고 있는 투신권이 채무 재조정안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앞길이 순탄치 않다. 이번 대선을 넘길 공산도 커지고 있다. 채권기관 한쪽에서 “대선 뒤 하이닉스 해법이 바뀔 수 있는 만큼 채무 재조정을 늦춰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이런 와중에서 하이닉스는 현재 시간과의 숨가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현금흐름 사정이 나쁜 만큼 채무 재조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하이닉스 구조조정 자문사인 도이체방크의 실사보고서는 회사채와 신용보증기금채권 만기가 돌아오는 내년 초면 자금이 바닥을 드러내는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당장 투신권 협조 여부에 따라 하이닉스 생존이 왔다갔다하는 형편인 셈이다. 처리방안 확정이 늦춰진 탓에 하이닉스는 그동안 제때 투자를 하지지 못했고, 이에 따라 경쟁력이 더욱 뒤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누적적자 1조원 넘어서

그동안 하이닉스 부실은 더 깊어졌다. 올 3분기까지만 해도 누적적자가 1조원을 넘어섰다. 2000년 2조4천억원, 지난해 5조7천억원의 적자에 이어 적자 폭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다. 채권단의 몇 차례 외부수혈(전환사채 인수 등 금융지원)로 수명을 연장해왔을 뿐이다. 매각, 청산, 독자생존으로 갈리면서 하이닉스 처리해법이 1년6개월 가까이 표류한 탓에 특단의 조처나 상황이 없으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처지까지 내몰린 것이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구조조정안이 나왔지만 공식 확정되거나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다. 다들 구조조정안에 대한 관심이야 많지만, 언론에 무슨 얘기가 나오든 이젠 무뎌져서 별 감각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한숨지었다.

하이닉스 처리를 둘러싼 지금의 상황은 생존을 위한 시간을 벌고 있는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닉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쪽은 “일단 하이닉스가 기업가치를 유지하도록 한 뒤 도이체방크 권고대로 새로운 주인을 찾아 매각하는 방법 외에 다른 묘수가 없다. 신규자금 지원 없이 경영 정상화를 도모해갈 생각이다”고 말했다. 매각은 여의치 않고 신규 지원도 어려운 진퇴양난 속에서 채무 재조정으로 연명시키면서 정상화를 꾀한 뒤 적절한 시기에 다시 매각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물론 ‘원치 않은’ 대주주가 된 채권단으로서는 제값을 받고 파는 게 급선무다. 하이닉스로서도 채권단의 “현명한 선택”만 기대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도이체방크는 채무 재조정과 함께 비메모리 부문 등 비핵심 자산을 순조롭게 팔면 2006년부터 채무를 갚을 수 있을 정도로 정상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신규 지원 없는 정상화는 불투명하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출자전환을 통해 하이닉스가 정상화될 거라는 데 확신을 갖지 못하는 채권기관도 있다. 반도체업 시황이 워낙 예측불허라는 점도 하이닉스 앞날에 놓인 큰 변수다. 구조조정안이 순조롭게 이행돼 생존의 발판을 마련하더라도 정보기술(IT) 시장 침체와 극심한 수요부진, 공급과잉에 따른 D램 가격하락이 지속되면 생존에 먹구름이 드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이닉스쪽은 “내년에 반도체 시장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데, 그 시점이 1분기에 빨리 도래할지 아니면 하반기로 미뤄질지 여부가 경영 정상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강도 높은 자구노력 외에 시장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회생은 쉽지 않다.

투자 위축… 경쟁력 계속 떨어져

올해야 그럭저럭 꾸려나가며 넘겼지만 문제는 내년 이후다. 갚아야 할 빚이 내년에 1조원, 2004년에는 한꺼번에 3조4천억원이나 몰린다. 현금흐름도 나쁘지만 더 급박한 건 설비투자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경쟁력에서 더욱 뒤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극심한 불황을 겪는 세계 D램업계는 빅뱅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는가 하면 공급과잉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벼랑 끝에 모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독일의 인피니온과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하이닉스 등을 제소하면서 통상압력을 제기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런 반도체 업계의 지각변동에도 하이닉스는 처리방안조차 확정되지 못한 채 차기정권으로 넘어가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특성상 한해 최소 1조∼2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의 신규 투자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그동안 경쟁력 유지를 위한 투자에 제대로 신경쓰지 못했다. 게다가 이미 앞서 나가는 경쟁업체들을 따라잡으려면 더 많은 실탄이 필요하다. 물론 채무 재조정안이 확정되면 유동성 뇌관은 당장 폭발하지 않겠지만, 영업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채무 재조정과 비주력사업 매각만으로는 충분한 투자재원을 확보하기 어렵다. 삼성전자 등은 신규 장비를 투입해 한 단계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반도체 물량을 공격적으로 뽑아내고 있지만, 하이닉스는 투자비가 적게 드는 기존 장비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과정에서 하이닉스의 D램 시장점유율은 5∼6%가량 떨어졌고, 원가 경쟁력에서도 밀리고 있다. 회사쪽은 부인하지만, 연구인력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하나둘씩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최근 0.10㎛(미크론)의 초미세 회로선폭 기술(골든칩)을 적용한 512메가 더블데이터레이트(DDR) SD램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정기술에서 ‘마의 벽’으로 인식돼온 0.10㎛을 뛰어넘어 90nm(나노미터·0.09㎛)급 기술 개발에 벌써 다가섰다. 미크론 시대를 넘어 나노급 초미세공정기술 시대로 저만치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칩을 새겨넣는 원판인 웨이퍼도 8인치(200mm)에서 차세대 12인치(300mm) 라인으로 나아가는 추세다. 교보증권 김영준 연구원은 “하이닉스는 12인치 웨이퍼에 전혀 투자가 안 되고 있다. 2004년으로 예정된 12인치 라인 가동이 생각보다 빨리 도래할 수 있다. 그만큼 현금을 설비투자에 써야 하는 시점인데, 하이닉스가 계속기업으로 생존을 보장받으려면 시설투자를 더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빠른 시간 안에 경쟁업체들을 쫓아가려면, 또 이를 통해 조기 회생을 꾀하려면 당장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사실 반도체는 기술로 먹고사는 분야라서 불황에도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투자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직원들 대상으로 ‘새마을 운동’

비록 회사 재무구조는 엉망이지만 반도체 공장의 생산라인은 연중무휴로 풀가동되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 청주공장의 직원 김아무개씨는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 놓인 뒤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직원들 사이에 휴짓조각이 된 우리사주는 아예 포기하고 살기로 하는 등 현실을 인정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또 우리나라 산업의 자존심인 반도체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하이닉스 처리방안이 뚜렷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지만 초기의 동요하던 모습은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이런 열의를 살려 직원들을 대상으로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재건운동을 벌일 참이라고 덧붙였다.

33만평에 이르는 이천공장에는 하이닉스반도체만 있는 게 아니다. 이름이 다른 회사 간판이 무려 34개나 달려 있다. 하이닉스가 그동안 여러 사업부문으로 이리저리 쪼개지고 팔려나가면서 여러 기업이 입주한 공단처럼 변해버렸다. 수없이 내걸린 회사 팻말들은 위기에 빠진 하이닉스의 처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기업 구조조정이 마무리단계에 왔지만 하이닉스는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마지막 뇌관이다. 치열한 생존게임을 벌이고 있는 하이닉스 미래는 아직도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조계완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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