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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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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적 지배구조, 후진적 경영

등록 2002-08-22 00:00 수정 2020-05-03 04:22

민영화 과정에서 주식분산 잘 이뤄져…전임 경영자가 후임자 ‘낙점’하는 구조가 문제

포항종합제철은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68년 창립 이래 34년간 사용해오던 회사 이름을 포스코(POSCO)로 바꿨다. 이는 해외 증시에 상장돼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 정부 지분이 완전 매각된 민간기업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조처다. 외환위기 이후 수차례의 지분 해외매각이 이어지면서 정부 및 정부투자기관이 보유한 포스코 지분은 98년 26.7%에서 지금은 0.03%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은 지분이 포스코가 한때 공기업이었음을 어렴풋이 보여줄 뿐이다.

민간 철강업체로서의 포스코는 이미 익을 대로 익은 기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더 이상의 성장이 어려운 것 아니냐는 게 걱정거리일 정도다. 포스코는 지난 99년 1조5천억원대, 2000년 1조6천억원대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경기가 불황이던 지난해에도 8193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경영성과를 측정하는 주요 지표 중 하나인 자기자본 대비 이익의 비율은 10% 안팎으로 아주 높은 편에 속한다. 모건스탠리 아시아·태평양본부가 지난 8월 초 낸 보고서는 “포스코는 불황과 호황을 넘나들며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공격과 방어 ‘양수겹장’의 이익을 줄 수 있는 회사”라고 평가했다.

그런 초거대기업이 재벌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재벌 중심의 한국경제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여러 기업이 재벌의 손에 넘어갔지만, 포스코는 재벌의 손을 전혀 타지 않았다. 순자산이 11조2천억원대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워낙 크기도 하지만, 민영화가 이뤄지는 동안에는 1인당 지분한도를 3%로 제한해 어느 재벌도 감히 포스코의 주인이 되겠다고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스코의 대주주 중 현재 지분율이 5%를 넘는 곳은 없다. 최대주주인 포항공대의 지분도 3.24%에 불과하다. 주식분산이 아주 잘 이뤄져 선진적인 기업 지배구조를 갖출 만한 기본조건은 마련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포스코는 과연 우리나라에 기업 지배구조의 새로운 모범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 수사에서 드러난 포스코의 경영행태는 선진적 지배구조를 갖춘 민간기업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는 점을 보여줬다. 검찰에 따르면, 유상부 회장은 지난해 3월 정부 관계자의 압력을 받고 타이거풀스 주식 20만주를 고가에 매입하도록 계열사들에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 회장의 지시는 포스코가 형식상으로는 민간기업이지만, 경영진은 정부나 권력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 회장은 이 때문에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포스코는 또 최규선 게이트에 관련된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포스코 경영연구소 고문으로 선임해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투명경영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앞으로 포스코의 경영진이 어떻게 구성돼야 하느냐는 질문을 다시금 던졌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타이거풀스 주식 매입이 주는 교훈

포철은 공기업이었지만 김영삼 정부 이전까지만 해도 설립을 주도한 박태준 명예회장의 아성이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 박씨가 실각하고, 김만제씨가 한때 경영을 맡기도 했으나, 현 정부가 들어서자 ‘박태준 사단’은 다시 돌아왔다. 현 유상부 회장이 박태준 전 회장의 사실상 ‘지명’으로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 회장이 시민단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난해 5월 박씨를 명예회장으로 위촉한 것도 박 명예회장의 포스코에 대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일이다. 포스코 경영에 대한 우려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지배주주가 따로 없는 상황에서 그동안 포스코를 이끌어온 경영진들이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정치권과 거래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신우리사주제도 도입의 숨은 의도

포스코가 민간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마련한 기업 지배구조는 비교적 선진적이다. 유상부 회장은 98년 회장으로 취임한 뒤 국내 공기업 최초로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이사회 구성원을 사외이사 8명, 사내이사 7명으로 사외이사가 더 많도록 했다. 포철의 정관은 사외이사 중 5명은 지분의 절대규모에 관계없이 상위 5대 주주가 1명씩 추천하도록 하고 있다. 주주에 의한 경영감시가 어느 정도 작동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주주들이 경영권 확보에는 큰 관심이 없는 투자회사들로 구성된 상황에서 적대적 인수합병의 가능성이 완전 봉쇄돼 있는 것은 경영감시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포스코는 언제든 보통주로 전환 가능한 전환우선주를 총주식 수의 25%까지 발행할 수 있도록 정관에 명시하고 있다. 누군가 경영진을 교체하기 위해 적대적 인수합병에 나설 경우 전환우선주를 활용하면 인수합병 노력을 쉽게 무산시킬 수 있는 것이다. 특수관계인을 포함해 지분율이 3.59%에 불과한 포항공대의 경영권이 흔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포항공대는 현 경영진의 통제 아래 있다.

신우리사주제도 도입의 숨은 의도

그런 가운데 지난 7월 포스코가 국내 기업 중 가장 먼저 도입한 신우리사주제도(ESOP)는 앞으로 경영권의 향배와 관련해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포스코는 지난 7월23일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 63만3900주(총발행주식의 0.67%)를 우리사주조합에 넘겼다. 이 중 절반은 시장가인 주당 13만50원에 매각한 것이고, 나머지는 무상으로 증여한 것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400억원을 우리사주조합에 공짜로 넘겨준 셈이다. 회사가 자사주를 조합에 매각하거나 증여하도록 허용하고 이에 대해 세제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한 ‘근로자복지기본법’이 올해부터 시행된 데 따른 조처다. 그러나 다른 기업들이 회사의 부담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신우리사주조합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포스코가 이런 제도를 먼저 도입한 것이 순전히 종업원들의 복지 향상만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포스코의 우리사주조합 플랜은 2006년까지 5년 동안 직원들이 회사가 보유한 자사주를 매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회사는 직원들이 사는 만큼의 자사주를 무상으로 출연하게 된다. 직원들은 1주의 가격으로 2주를 살 수 있기 때문에 취득 가능한 주식 전량을 살 가능성이 크다. 우리사주조합이 앞으로 5년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주식은 최대 329만주로, 포스코 발행주식의 3.5%에 해당한다. 최대주주인 포항공대의 지분율에 버금가는 규모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이에 대해 “우리사주조합 플랜은 경영진에 우호적인 지분을 늘리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관련 법령이나 포스코의 우리사주조합 규정을 보면, “조합원 개개인이 보유한 지분의 의결권은 원칙적으로 우리사주조합 대표가 조합원 개개인의 의사를 물어 행사하되, 별도의 의사표시가 없으면 섀도 보팅(참석주주들의 찬반비율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는 방식)을 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우리사주조합은 대개 경영진에 우호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포스코의 우리사주조합이 보유하는 지분도 경영진에 우호지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구도대로라면 앞으로 포스코의 경영진은 현재 경영진이 후임자를 계속 임명해가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큰 셈이다. 민영화를 앞둔 공기업들이 포스코의 이런 지배구조를 열심히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배주주 없는 기업의 실험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돼 불구속 기소된 유상부 회장은 지난 7월 말 사외이사들에게 대표이사직을 계속 수행해도 되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사외이사들은 만장일치로 유 회장을 재신임했다고 회사쪽은 밝혔다. 이에 따라 유 회장은 임기가 만료되는 내년 3월까지는 회장직을 계속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유 회장 다음의 최고경영자는 어떻게 임명될까? 유 회장은 올해 초 미국 기관투자가들을 위한 기업설명회에 앞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민영화 초기에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후계자를 천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차기 최고경영자의 선정에 자신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그는 “정치논리만 배제된다면 포스코의 후계자 선정 과정은 국내 기업의 표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포스코 안팎에서는 전임 경영자가 사내인사 중에서 자신의 입맛에 맡는 후임자를 발탁하는 구조가 오히려 정치권의 간섭을 자초하거나 정권과의 유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모범답안이 딱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의 산업정책에 의해 기업의 운명이 크게 좌우되는 한국사회 현실에서 ‘지배주주 없는 기업’이 어떻게 선진경영을 일궈낼 수 있을지, 포스코는 중요한 실험장이 되고 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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