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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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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아의 생존을 위한 도약

등록 2003-02-21 00:00 수정 2020-05-03 04:23

미국 주행시험장 건설 등 세계시장 개척에 나서…시장개방에 맞서 수출활성화에 전력 다해

미국 서해안의 로스앤젤레스(LA) 북쪽 160Km 모하비 사막.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벌판이던 이곳에서 최근 요란한 중장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현대·기아자동차가 560만평의 땅에 주행시험장을 건설하기 위해 2월13일부터 삽질을 시작한 것이다. 말이 560만평이지 여의도 면적의 6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현대차의 남양주 주행시험장과 견줘도 10배가 넘는 광활한 땅이다. 주행시험장 공사를 시작하던 날 LA 남쪽 얼바인에서는 현대·기아차 디자인&테크니컬센터가 준공됐다. 미국에서 생산할 차량의 디자인과 구조를 설계하는 역할을 담당할 곳이다.

세계 5대 메이커 진입 가능한가

현대·기아차가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미국시장 공략의 전초기지들이다. 물론 이들은 지난해 착공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자동차 생산공장과 연계돼 있다. 디자인센터가 새차를 개발하면 주행시험장에서 이를 시험하고, 앨라배마 공장에서 완성차들을 생산하도록 짜여 있다. 미국시장을 발판으로 세계 5위권 자동차 메이커로 진입하려는 현대·기아차의 거대한 프로젝트가 하나씩 구체화돼가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올해부터는 중국과의 합작공장인 베이징 소재 북경현대·기아차가 쏘나타 현지 생산을 시작한다. 올해 5만대를 생산하고 2005년에는 20만대를 생산할 계획이다. 우물 안 개구리이던 한국의 자동차가 세계를 향해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셈이다.

국내 자동차업계가 세계시장을 향한 도약에 나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우자동차가 이미 ‘세계경영’을 내세우며 유럽에서부터 남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인 생산·판매 체제를 구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대우차는 1999년 7월 대우그룹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돌입과 함께 손을 들고 말았다. 겉으로는 외환위기의 충격파를 견뎌내지 못한 것으로 보였지만 근본적으로 자본과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제 현대·기아차가 바통을 이어받아 세계시장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미국시장을 발판으로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한 힘겨운 행군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세계 5대 메이커로의 진입’이란 구호는 무모해보이기까지 한다. “100년 가까운 역사의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 회사들에 맞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기아차는 이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

현대·기아차는 최근 2~3년에 비약적 성장을 해왔다. 현대차는 매출이 1999년 8조7천억원에서 2002년 27조3천억원으로, 기아차는 1998년 4조5천억원에서 2002년 14조1천억원으로 3배가량 증가했다. 생산규모는 현대·기아가 합쳐서 연간 344만대로 세계 7위(2001년 기준) 수준이다. 그러나 현대·기아차를 세계 7위 업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아직 없다. 그만큼 자본과 기술, 브랜드 가치, 세계적 마케팅 능력 등이 세계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제품력·마케팅력·코스트경쟁력의 3가지를 꼽는다. 제품력은 성능·안전성·품질 등을, 마케팅력은 새차출시·광고·판매·AS 등을, 코스트경쟁력은 새차개발비용·생산성·금융비용 등을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현대·기아차는 아직 가격쟁력 외에 내세울 것이 없다.

국내외 여건 악화된 상황에서

국내 자동차의 부품 국산화율은 95%를 넘어섰다. 그러나 실제 국산부품을 쓰는 비율은 90%에 그친다. 기술적으로 생산이 가능하더라도 경제성이 맞지 않아 수입품을 쓰는 게 낫기 때문이다. 게다가 핵심부품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자동변속기다.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현대차 가운데 하나가 싼타페다. 싼타페는 후륜구동형인데 국내에서 후륜구동형 자동변속기를 생산하지 못해 일본 회사에서 사들이고 있다. 엔진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각광받는 하이브리드 엔진이나 연료전지 자동차 개발을 위한 원천기술은 모두 해외에서 들여온 것이다. 경유차 매연을 줄이기 위한 커먼레일 방식의 연료분사 기술도 독일에서 들여온 것이다.

산업연구원의 조철 연구위원은 “미국에서 발표되는 자동차 만족도 조사는 가격대비 성능을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순수한 품질만 따지면 아직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차는 가격이 싼 덕분에 상대적인 만족도가 높게 나온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자동차 전문조사기관인 JD파워가 미국에서 발표하는 차종별 고장률 조사 등에서는 한국차들의 고장률이 여전히 높게 나오는 실정이다.

국내외 경영여건 또한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으로 올해는 지난해와 같은 매출신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2002년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 수요는 심각한 경기불황을 반영하듯 2001년보다 감소했다. 이라크전과 북한 핵위기에 따른 긴장감도 소비심리는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특히 이라크전 가능성으로 인한 유가의 고공행진은 자동차업계들에게 즉각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현대차의 자동차 수출은 2002년 12월의 10만9천대에서 2003년 1월 9만5천대로 12.8% 감소했다.

장기적으로 수입차들의 국내시장 공략도 위협요인이다. 지난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수입차 시장은 올해도 크게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 수입차 판매는 2001년 7747대에서 2002년 1만6119대로 108%나 늘었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는 올해 수입차 판매가 60% 이상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수입차업체들은 오는 5월 독자적인 모터쇼를 열어 판매확대에 나설 예정이다. 특히 세계적인 품질과 가격 경쟁력이 있는 일본차의 공세는 위협적이다. 지난해 도요타의 렉서스 ES300이 단일 수입차종으로 최다판매를 기록한 것은 일본차의 성장 잠재력을 잘 보여준 것이다. 일본차는 특히 2000cc 이상의 국산 고급차 고객들을 대거 빼앗아갈 것으로 보인다.

내수시장 잠식해 오는 수입차

또 하나의 변수는 정부의 특소세 체계 개편 방침이다. 국내 자동차시장은 올해를 계기로 내년부터 크게 바뀌게 되어 있다. 현행 3단계로 되어 있는 특소세 체계를 2단계로 개편하기 때문이다. 1500cc 이하(7%), 1500~2000cc(10%), 2000cc 초과(14%) 등으로 되어 있는 세율체계를 1600cc 이하와 1600cc 초과로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쪽의 강력한 통상압력에 따른 것으로 정부가 지난해 말 미국쪽에 세율 개편을 약속한 상태다. 국내 자동차업계도 세율 개편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특소세 체계 때문에 내수용으로는 1500cc, 수출용으로는 1600cc 차량을 따로 생산하는 등 생산·개발비를 2중으로 부담해왔기 때문이다.

특소세율을 개편하면 2000cc 이상 대형 차량의 특소세가 큰 폭으로 내리게 된다. 당연히 대형차 구입이 늘어나고, 대형차를 주종으로 하는 수입차 판매가 활성화된다. 수입차업체들이 국내시장 점유율을 크게 늘릴 수 있는 계기를 맞는 것이다. 반면 국내 자동차업계들은 개발비와 생산비를 절감해 수출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

결국 내수시장을 수입차에게 어느 정도 쪼개주는 것은 불가피한 대세다. 따라서 국내업계는 수출 활성화로 이를 만회해야 한다. 국내 자동차업계에게 세계시장으로의 진출은 발전이 아니라 생존수단이 되는 셈이다. 어차피 르노삼성과 GM대우는 르노와 GM의 플랫폼을 한국에 들여와 조립 생산한다. 하청기지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현대·기아차가 세계시장에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느냐 여부가 국내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현대·기아차가 최근 미국시장에서 품질과 기술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특히 쏘나타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싼타페는 가장 잘나가는 차종이다. 두 차종은 자동차 전문조사기관 JD파워가 2002년 하반기에 실시한 초기품질지수(IQS) 평가결과 동급에서 각각 2위와 3위를 기록했다. 북미시장에서 판매되는 현대차의 대당 판매단가도 1998년 7228달러로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가 99년 7898달러, 2000년 9343달러, 2001년 1만452달러로 높아졌다. 저가 자동차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이는 상황이다.

10년을 지고 가야 할 지상과제

자동차회사는 세계적으로 5~6개 메이저업체를 제외하고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이름을 들자면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 유럽의 다임러-크라이슬러와 폭스바겐, 일본의 도요타 정도다. 나머지 회사들은 이들과 제휴를 맺거나 틈새시장을 파고들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 현대·기아차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국내에서는 부동의 1위 업체지만 세계시장에서는 다임러-크라이슬러라는 메이저업체와 제휴를 맺고 있는 마이너리그 소속업체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개방이 가속화되면 국내 소비자들로부터도 언제든지 외면당할 수 있는 처지다.

‘생존을 위한 도약’. 현대·기아차가 앞으로 10년 동안 짊어지고 가야 할 지상과제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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