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초 아남반도체에서 일하던 이봉렬씨가 클린룸 안에서 방진복을 입고 찍은 사진. 이봉렬 제공
인공지능(AI) 산업의 급성장이 불러온 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간 지속되는 초호황기)이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다. 막대한 이익이 발생한 상황에서 ‘과실의 공정분배’라는 화두를 던졌다. 기업과 노동자, 주주들이 저마다의 기여도를 주장하고 있는 공론장에서 하청 노동자, 정부와 국민은 소외됐다.
이봉렬씨는 1988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뒤 38년 동안 반도체 업계에서 일해온 현장 전문가다. 국내 대기업과 하청업체에서도 일했으며, 한 반도체 기업의 노동조합 결성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싱가포르에 있는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에서 일하다 2026년 현장을 떠났다. ‘오마이뉴스’에 반도체 전문 시민기자로 글을 쓰고 있는 그에게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40년 가까이 대기업, 하청업체, 싱가포르 장비회사, 싱가포르 창업 등을 통해 반도체 업계에 몸담았다. 각 경험을 통틀어 느낀 ‘반도체 업'의 특성이 있나.
“생태계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야가 바로 반도체라는 생각이 든다. 반도체 팹(Fab·반도체칩을 만드는 제조라인 전체)이 아무리 훌륭해도 장비, 부품, 소재, 설계 등 다양한 분야와의 협력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반도체 생산공정에서 하청업체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협력업체와 사내 하청업체로 나눌 수 있는데, 종합반도체 기업과 장비·소재를 공급하는 협력업체는 사실상 갑과 을로 나눌 수 없는 대등한 관계다. 사내 하청업체의 경우 현장에서 팹 내부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애초 비용 절감의 수단으로 시작된 측면은 있으나, 수평적 동반자 관계로 진화하고 있다. 다만 한국은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하청업체가 정당한 목소리를 내고 대우를 받는 데 여전히 한계가 있다. 위험의 외주화나 불공정한 성과 배분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AI 열풍이 불러온 역사적인 호황을 바라보는 심경은 어떠한가.
“오래전부터 반도체산업은 수요와 공급의 시차로 인해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사이클 특성이 있었다. 최근 AI 인프라 수요는 과거의 단순한 사이클을 넘어 안정적인 장기 호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AI용 반도체는 고대역폭메모리(HBM)처럼 공정 난도가 매우 높아, 선단 공정 능력을 갖춘 소수 업체가 시장을 주도할 것이며 당분간 한국 기업의 독주가 예상된다. 한국 반도체 기업이 반도체 시장의 주역이 되는 과정을 지켜봐왔으면서도 새삼 놀랍다.”
—한국 반도체 기업 노동자들이 엄청난 성과급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과실 배분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성과급 상한선을 폐지한 상황에서 삼성전자 역시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핵심 엔지니어들의 대이동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공간에서 땀 흘리는 사내 하청 직원들과의 격차는 기업이나 정부 차원의 조정이 없다면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나 안전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반도체법을 통한 지원이 지금처럼 재벌 기업에 돈을 퍼주는 식이 아니라, 협력사나 하청업체에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세밀하게 설계돼야 한다.”
—경기도 용인에 조성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신규 반도체 산업단지는 어떻게 생각하나.
“반도체 팹은 거대 자본과 에너지가 투입되는 장치산업이며, 가동 중단시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보통 분산 배치를 통해 리스크를 관리한다.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자연재해나 공급망 훼손에 취약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재생에너지가 풍부하고 리스크 분산이 가능한 호남 등 새로운 지역에 산단을 조성하는 것이 기업의 미래와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훨씬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이는 기업에만 맡겨놔서는 될 문제가 아니라, 산단 조성에 책임이 있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적 의지가 필요한 문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산지소’(지역에서 생산한 에너지를 그 지역에서 소비한다)를 이야기한 이유를 실무자가 이해하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한겨레21을 비롯한 언론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상당수 언론이 반도체를 수출 효자나 국가 전략산업으로만 보며 기업 입장만을 대변하곤 한다. 하지만 반도체산업은 막대한 전력과 용수를 소비하며 기후위기나 환경오염의 우려를 안고 있고, 24시간 가동 체제 속에서 노동자 건강권이 위협받는 등 가려진 그림자도 많다. 한겨레21이 그간 이런 이면을 잘 보도해온 것으로 알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인 감시와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해주길 바란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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