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우편 ‘받은 편지함’에 2022년 11월 전기·가스 요금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기대와 불안이 섞인 마음으로 편지함을 열어보니 무려 202파운드, 30만원을 훌쩍 넘는 금액이다. 한 달간 아낄 만큼 아꼈는데도 그랬다. 정부에서 권장하는 대로 목욕을 샤워로 대체했고 운동을 핑계 삼아 동네 헬스장에서 샤워한 것도 여러 번이다. 대폭 낮춘 실내온도에 맞춰 옷을 여러 벌 겹쳐 입기도 했다. 그런데도 30만원이라니.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사실 10월부터 심상치 않았다. 평년보다 기온이 높아 보일러를 몇 번 돌리지 않았는데도 요금이 처음으로 20만원 선을 넘었다. 에너지 가격이 전월 대비 25% 인상됐기 때문인데 지난해 이즈음에 견주면 두 배나 높은 가격이다. 어쨌든 덕분에 많은 사람이 에너지 절약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10월 이후 영국 에너지 소비가 10% 넘게 하락했다고 한다.
하지만 절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겨울 영국의 에너지 비용은 가구당 연간 200만원(1277파운드) 수준이었다. 한국의 두 배에 이르는 높은 금액이었지만 가격이 안정적으로 관리됐기에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 1년간 에너지 가격이 치솟아 이것이 400만원(2500파운드)으로 급등했다. 정부 지원이 줄어드는 2023년 4월에는 480만원(3천파운드)으로 20% 인상이 예정돼 있다. 그래도 고소득·고자산층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고, 중산층도 해외여행을 조금 줄이는 등의 방식으로 큰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저소득층과 빈곤층이다. 에너지 가격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지난봄부터 언론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쏟아냈다. 매주 22만원의 국가 연금을 받으며 공공임대주택에서 사는 엘시 할머니는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실내온도를 낮췄다. 노인에게 추위는 치명적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집을 나와 난방하는 버스를 종일 타기 시작했다.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질문을 받은 보리스 존슨 당시 총리는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자신이 65살 이상 노인이 24시간 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며 자화자찬을 늘어놓아 진행자의 분노를 샀다. “그래서 할머니가 총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겁니까?”
얼마 전에는 천식 환자가 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가벼운 감기에 걸렸을 때는 따뜻한 집에서 푹 쉬어야 하는데 난방할 여유가 없어 감기가 천식으로 악화한 사례가 다수 보고됐다. 폐질환 환자 절반이 에너지 위기, 생계비 위기가 시작된 이후 증상 악화를 경험했다고도 한다. 박물관·미술관·도서관 같은 공공기관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홍보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 기관조차 높은 에너지 비용 때문에 문을 닫거나 영업시간을 줄여야 할지 모른다.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나 통계도 이런 사례들만큼이나 극적이다. 영국의 총 에너지 비용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64조원(2%)에서 304조원(8%)으로 거의 다섯 배 늘었다. 2023년 4월 가구당 연간 에너지 비용이 480만원으로 증가하면 무려 1200만 가구가 세전 소득의 10% 이상을 에너지 비용으로 지출하리라고 예측된다. 이 중 900만 가구는 일정 수준의 정부 지원을 받지만 나머지 300만 가구는 에너지 가격 상한제(Energy Price Guarantee) 외에는 어떤 혜택도 누릴 수 없다. 인구의 10%를 상회하는 300만 가구, 720만 명의 영국 국민이 이른바 에너지 빈곤의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이런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 정부는 에너지 가격 상한제를 시행해 에너지 가격을 연간 480만원 수준으로 묶어놓았다. 가격 상한제 없이는 2023년 초 가구당 연간 에너지 비용이 1천만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므로, 1천만원과 480만원의 차액에 해당하는 520만원을 정부 재정에서 에너지 공급업체에 보전해줘야 한다. 2022년 1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차액 보전에만 물경 90조원(560억파운드)의 재정이 투입될 거라고 한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에너지 비용 관련 영국의 정부지출이 계산 방식에 따라 GDP 대비 3~4% 수준이지만 독일은 무려 7.4%에 달하는 365조원(2640억유로)의 예산을 책정했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드가 GDP 5.1% 규모의 에너지 관련 재정지출을 결의하는 등 유럽 대부분 국가가 GDP 대비 3%를 상회하는 비용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과 같이 전력공급업체가 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프랑스의 지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2.8%)이 눈에 띈다.
에너지 관련 지출만 따로 놓고 보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지난 2년간 유럽 국가들의 재정 상황은 상당히 악화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영국의 팬데믹 관련 정부지출은 무려 500조원(3110억파운드)에 이른다. 임금과 사업손실 보전에만 200조원(1220억파운드)을 썼다.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인 2020년 초 GDP 80% 수준이던 국가부채는 막대한 재정적자로 이제 100%에 육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성장 잠재력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리즈 트러스 정부는 에너지 가격 상한제와 더불어 대규모 부자감세 정책을 발표했다. 법인세를 낮추고 고소득층의 세금 부담을 줄이면 투자가 늘고 경제가 활성화돼 종국적으로 성장의 과실을 전 국민이 누리게 된다는 전형적인 우파 정책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감세는 단기적으로는 재정적자를 증가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세수를 늘려 국가부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대와 달리 시장 반응은 차가웠다. 영국 국채에 대한 투매가 시작되면서 국채수익률이 급등했다. 장기 정부채권을 대량 보유하던 연금펀드들의 부도를 막기 위해 영국 중앙은행은 긴급히 100조원(650억파운드)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했다.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급등하는 등 금융시장의 불안이 지속되면서 트러스 총리는 출범 44일 만에 불명예스럽게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우파 정부의 감세 정책에는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다. 어쩌면 정책 규모와 추진 속도가 문제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영국 역사상 초단명 정부가 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영국 정부 재정에 더 이상 여력(Headroom)이 없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남은 대안은 긴축뿐이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영국은 엄혹한 긴축정책을 수년간 감내해야 했다. 이후에도 영국 경제는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와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커다란 암초를 만나 두 번이나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경제규모가 아직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에너지 위기가 시작됐고 물가는 10%나 뛰었다. 트러스의 확장적 재정정책은 시장과의 대결에서 참패했고 새로이 출범한 리시 수낵 정부는 감세를 폐기하고 증세에 나섰다. 영국은 이미 ‘긴축 2.0’이라는 길고 고통스러운 터널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어지는 질문은 간명하다. 누구 잘못인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답변도 그만큼 명확하다. 러시아다. 푸틴이다. 요새 경제정책과 관련한 대부분의 연설과 성명에는 “푸틴이 시작한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라는 식의 표현이 등장한다. 정치인들의 거듭된 책임 전가에 어이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가격이 몇 배나 뛴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전쟁의 불법성은 사태의 일면에 불과하다.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도 에너지 위기의 주요 요인이다. 지원이 없었다면 전쟁은 아마도 몇 개월 전에 끝났을 테고 에너지 가격도 이미 안정됐을 것이다.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크라이나 지원의 실질적 경제 비용이 수백조원에 달하며 그로 인해 저소득층과 빈곤층이 벼랑 끝에 몰리고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영국인은 대체로 우크라이나 지원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 여기저기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에너지 위기 속에서도 연대의 불꽃이 계속 활활 타오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물론 경제적 비용만 고려할 수는 없다. 영국은 유럽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주도하면서 유럽 안보의 중심 국가로서 위상을 한층 강화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공고히 한 것도 또 다른 소득이다. 유럽 전체를 놓고 보면 전쟁이 야기한 수천조원 규모의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미국 대신 유럽이 감당한 셈이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국방비를 늘리기 위해 상당한 압박을 가해왔는데 유럽도 이제 미국을 계속 붙잡아놓을 명분을 확보했다. 이런 대외적 성과가 장기적으로 엄청난 경제적 가치로 실현될지 모른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전기와 가스가 끊긴 엄혹한 환경에서 우크라이나인은 긴 겨울을 견뎌야 한다. 곧 정치협상의 시간이 시작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전쟁의 향배는 어쩌면 매월 전기·가스 요금 청구서를 기다리는 유럽인의 불안한 마음에 달려 있을 것이다.
런던(영국)=전희상 경제학 박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승환, ‘구미 사태’ 후 공연 요청 줄이어…“7월까지 ‘헤븐’ 투어”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내란 비선’ 노상원 수첩에 정치인·언론인 ‘사살’ 표현 있었다
[단독] ‘총선 전 계엄’ 윤석열 발언 당일 신원식, 김용현 불러 대책 논의
‘윤석열 버티기’ 상관없이…헌재, 탄핵심판 준비 착착
이승환 “‘정치 언행 않겠다’ 서약 거부, 구미 공연 취소 통보 진짜 이유”
윤석열 쪽 “엄연한 대통령인데, 밀폐 공간에서 수사 받으라니”
[단독] 윤석열, 3월 말 “조만간 계엄”…국방장관·국정원장·경호처장에 밝혀
홍준표, 마음은 대선 ‘콩밭’…“대구 시장 졸업 빨라질 수 있어”
[단독] “말 잘 듣는 장교들, 호남 빼고”…‘노상원 사조직’ 9월부터 포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