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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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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버터칩’ 디스, 전쟁의 시작?

항공업계 재벌 3세 경영자와 전문경영인의 전면전 서막 보여준 대한항공
‘땅콩 리턴’ 사건에 대한 에어아시아의 대응
등록 2014-12-17 14:57 수정 2020-05-03 04:27

전세계 항공업계 역사에서 전대미문 사건인 대한항공의 ‘땅콩 리턴’은 국내외에서 많은 신조어를 낳으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 에어아시아 회장인 토니 페르난데스는 박지성 헌정 항공기를 제작해 한국 운항을 개시하는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방문 중이었다.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한국에서 허니버터칩이라는 과자가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 많이 확보해 기내 서비스로 제공하고 싶다. 하지만 허니버터칩은 봉지로 제공될 것이며, 접시에 담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타이밍에 시쳇말로 호연지기 넘치는 ‘디스’를 날린 것이다. 인터넷은 뜨거워졌다. 에어아시아는 순식간에 검색어 상위에 올랐고 에어아시아의 프로모션까지 덩달아 관심을 받았다.

토니 페르난데스 에어아시아 회장(왼쪽)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모습. ‘땅콩 리턴’을 두고 벌어진 두 업체의 대응은 앞으로 한국 항공시장에 있을 싸움의 구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한겨레

토니 페르난데스 에어아시아 회장(왼쪽)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모습. ‘땅콩 리턴’을 두고 벌어진 두 업체의 대응은 앞으로 한국 항공시장에 있을 싸움의 구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한겨레

이 ‘디스’는 메이저 항공사들의 중단거리 꿀노선을 방해하는 골칫거리였던 저비용항공사(LCC)의 공습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하늘에서 벌어질 여객 분야의 어떤 전쟁의 서막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한국의 양대 항공사를 포함한 많은 LCC가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에서 정치권력과의 특수한 관계로 형성된 재벌 체계의 연장에 있는 반면, 해외 LCC는 항공산업의 바닥부터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올린 전문가나 다른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며 독특한 ‘쌈닭’ 기질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디스’를 날린 페르난데스 회장이 바로 항공산업에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외국계 기업 직원으로 시작해, 퇴사하며 처분한 스톡옵션으로 부채가 심각했던 말레이시아의 한 항공사를 단돈 300원에 인수해 아시아 최초로 LCC를 도입해 1년 만에 모든 부채를 갚아버렸다. “나우 에브리원 캔 플라이”(Now Everyone Can Fly)를 외치며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 구석구석에 노선을 미친 듯이 확장 중이다. 에어쇼에서는 한번에 비행기 200대를 ‘질러’버리고, LCC가 뻗지 못한다고 믿었던 장거리까지 넘보고 있다.

그동안 전문경영인을 필두로 LCC 공습에 대항해 한국의 양대 항공사, 특히 대한항공은 ‘고급화’를 전략으로 내세웠다. 시장 변화를 예민하게 읽는 항공사들이 프리미엄 클래스의 한계를 직시하고는 비즈니스와 퍼스트를 통합하고 이코노미를 세분화하는 추세였지만 대한항공은 약간 다른 행보를 보였다. 물론 이런 고급화는 일반석엔 해당되지 않았다. 일반석은 기내식과 자리 간격을 빼면 LCC와 다를 바 없다는 평까지 흘러나올 정도다. 심지어 ‘고급화’ 전략에서도 약간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LCC와 타 항공사의 차별화를 위해 비즈니스석 한 열에 좌석 4개를 배치한 항공사들과는 달리 좌석 7개를 넣어 편의성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평을 받곤 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한항공의 행보에 대해 예전부터 업계에서는 ‘사주의 취향’이라는 ‘진실을 알 수 없는 소문’이 돌았다. 가장 우선적으로 안전함을 홍보해야 할 항공사가 여기저기 항공기가 뻥뻥 터지는 온라인 게임 로 기업 프로모션을 하고 비행기 도장까지 칠한 것도, 하루 만에 여러 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바뀐 적이 있다는 서비스 지시 사항도 바로 바닥부터 경험한 전문가들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사주의 입김이 아니냐는 의견들이다.

페르난데스처럼 바닥부터 체력을 길러 업계 전문가가 된 경영진을 둔 다국적 LCC와 기업 의사 결정에서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으며 처음부터 퍼스트클래스의 캐비아의 자개 스푼을 입에 물고 태어난 재벌 3세의 경영으로 전환 중인 한국 재벌 시스템 속의 항공사들은 앞으로 어떤 게임을 벌이게 될까? 단순히 저비용·저가와 고급화·차별화의 게임이 아닌 이유는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절대 갑은 이 싸움에서도 계속 절대 갑일 수 있을지 보는 것이 관전의 포인트다.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현재까지 보도된 사건들인 허니버터칩 디스와 땅콩 리턴, 그리고 과거 ‘명의회손’ 사건을 생각해보면 여론을 이끌고 호응을 얻는 능수능란함에서는 한쪽이 한 수 위로 앞서가는 것 같다.

아울러 대한항공이 이 사건이 잠잠해진 이후에도 해당 승무원들과 기장 그리고 조현아 전 부사장 등에게 어떤 행보를 보일지도 꼭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다. 적어도 대한항공은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이른바 플래그십이라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항공사였고, 이에 한 사주 집안의 것만은 아닌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규호 미국 일리노이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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