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상무님께.
지난해 4월15일 인천발 미국 로스앤젤레스(LA)행 항공기. ‘하늘 위의 호텔’이라는 별명이 붙은, 대한항공이 파격적으로 항공기 2층을 모두 비즈니스석으로 배치했다는 A380 기종의 기체 고유번호 HL7619에 탑승하신 뒤, 상무님에게는 많은 사건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 또한 라면이라는 것으로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상무님의 사건 뒤, 두 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평소 복용해오던 처방약이 떨어졌는데 미국의 극악한 의료 시스템 덕분에(?) 갑작스럽게 한국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한항공 A380을 타기 위해서 시카고에서 LA까지 미국 국내선을 타고 가야 할지, 항공기를 탄 뒤 평소 기내에서 잘 먹지 않는 라면을 먹어야 할지를 깊게 고민했죠. 주머니가 가벼운 탓에 항공비용을 최소화하려고 항공 덕후들 사이에서 ‘계륵’으로 불리는 델타항공 마일리지를 탈탈 털었습니다. 마침 지난 4월21일 미국 애틀랜타~인천행 대한항공에 비즈니스석이 있어 급히 예약하고 탑승했습니다. 기종은 아쉽게도 ‘하늘 위의 호텔’이 아닌 한국 항공 덕후 사이에서 ‘고등어’로 불리는 보잉777이었지만 말이죠.
옆자리에는 상기된 표정의 백인 아저씨가 앉아 계셨습니다. 아시아를 처음 방문하는지, 혹은 비즈니스석에 처음 탑승했는지 사뭇 들떠 있던 그분은 호기롭게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선택했습니다.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물끄러미 음식만 쳐다보던 그분에게 친절하게 ‘비비는 기술’을 보여드렸지요. 일찍이 이코노미석에서는 먹을 수 없는 잘 차려진 기내식을 먹고 난 뒤, 고민에 빠졌습니다. 라면을 먹을까, 말까. 당시 비즈니스석을 타면 덕후들은 모두 핫이슈를 좇아 라면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라면상무님이 대한항공 비즈니스석에서 보여주신 퍼포먼스는 지난해를 강타했던 ‘갑의 횡포’ 논란의 불쏘시개가 됐습니다. 사실 온갖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비즈니스석에서 굳이 라면을 먹는다는 게 항공 덕후인 저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라면상무님을 이해해보고자 시류에 편승해보기로 했습니다. 승무원에게 “요즘 시국에 죄송하지만 라면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전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친절을 보여주시는 국적항공사의 승무원답게 활짝 웃어주셨네요.
비즈니스석 라면에는 황태가 들어 있었습니다. 오이지가 반찬으로 정갈하게 나왔고요. 맛있더군요. 라면에는 역시 김치라지만, 김치는 명실공히 한국 대표 음식이지만, 대한항공은 한국의 플래그십 항공회사임에도 기내에서 김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다소 쫄깃한 식감이 떨어지는 면발에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산에서 밥을 지으면 설익듯 10km 상공에서 기압과 조리시설의 제약으로 기내에서 육지처럼 라면을 끓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으니까요. 이 때문에 항공기에서는 일반적으로 봉지라면 대신 컵라면으로 조리를 한다지요. 비싼 돈 들여 스위스 알프스에 올라가 굳이 1만원짜리 컵라면을 먹는 것처럼, 비싼 비즈니스석에서 굳이 먹는 라면은 ‘맛’ 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공간에서의 ‘별미’ 정도겠지요.
라면상무님, 항공기 승무원은 셰프도 서버도 아닌 기내 안전을 업무로 하는 이들입니다. 승무원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는 또 다른 라면상무님도 적지 않다던데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승무원이 개인의 취향에 맞는 라면을 대접하는 특급 라면 전문 요리사는 아니니까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항공기 기내식은 출발지의 음식을 선택하는 게 좀더 맛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서양 국가에서 출발할 때는 양식, 한국 출발엔 한식처럼. 하지만 라면 맛은 어디든 같을 겁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외국계 항공사의 외국인 승무원에게도 혹시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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