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박스에 키를 넣어 돌리고 점화 버튼을 누른다. 부르릉. 머플러에서 나오는 소리와 함께 강철로 만든 프레임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며 괜한 미소가 떠오른다. 엔진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라이더의 자긍심도 올라간다. 냉기가 느껴지는 가죽 시트에 엉덩이를 걸쳐놓고 오른손으로 스로틀을 열면 수백kg의 철마가 앞으로 돌진한다. 철커덩. 기계적 마찰음과 함께 기어 변속을 하다보면 속도계 속 바늘은 이미 법정 제한속도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난 세상의 주인공이니까. 반경 5km 안에선 내가 제일 눈에 튀고 제일 센 놈이다.
그래, 흔히 말하는 허세다. 모터사이클은 볼트 하나까지 모두 해체해 죽 늘어놓으면 저 끝에 망상과 허세와 맞닿아 있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가? 내가 운명의 장난 때문에 뒤바뀐 인생을 살고 있는 거라면? 사실 난 이렇게 평범하고 지루한 삶을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떤 거대한 사건이나 사고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면? 주말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신분이 바뀐 재벌 3세가 바로 나라면?
하지만 양친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카드 결제일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일하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일하는지 모호한 상황. 그래서 체념하고 다시 체념한다. 여기에 모터사이클의 존재가치가 있다. 모터사이클은 좋게 말하면 일종의 가상현실을 제공한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인 양, 이 ‘나와바리’ 최고의 수컷인 양. 롯데월드로 놀러가면서 ‘모험’이란 단어를 쓰진 않는다. 시설은 돈을 받는 대신 안전한 오락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땅에서 모터사이클을 탄다는 것은, 아니 그것을 꿈꾸는 것 자체가 모험이다. 남자는 할리를 꿈꾼다. 가와사키 닌자를 꿈꾸고 혼다 CBR를 꿈꾼다.
그런데 남자는 모험을 꿈꾸지만 돈이 없다. 출생의 비밀이 없는 평범한 젊은 남자가 1천만원을 훌쩍 넘는 자동차도 아닌 모터사이클에 쏟아부을 돈이 있을 리 만무하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오토바이를 산다’라고 하면 온 집안 사람이 말릴 것이다.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말릴 것이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친구들이 멘션·댓글·쪽지로 말릴 것이다. 카톡이 쉴 새 없이 울릴 것이다. 너 미쳤느냐고.
그래서 배 나온 라이더를 보면 마음 한켠이 애잔하다. 겨우겨우 청춘에 대한 보상으로 모터사이클을 선택한 것이다. 평생 교복을 입으며 살아왔다. 학교를 졸업했지만 군복을 입었고 검정 양복에 넥타이란 교복을 또 입고 살았다. 삶이란 프로레슬링 로프 반동처럼 덧없다. 로프로 상대방을 보냈는데 왜 돌아오냐고 묻는다. 하지만 안 돌아오면 시합이 계속되지를 않는다. 회사에 가면 생업의 장소에 가면 고단함이 있을 것을 알지만 로프 반동 당한 프로레슬러처럼 돌아갈 수밖에 없다.
딱 집에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만 남긴 이들이 간신히 지하철에 몸을 맡긴다. 삼겹살에 소주 냄새 풍기며 지하철에 찌그러져 있는 노병들을 보고 훈련병들은 비웃는다. 하지만 전장의 화약 냄새를 맡아보지 못한 훈련병들은 이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모른다. 오늘도 노병들은 주말에 모터사이클을 탄다. 풀페이스 헬멧과 짙은 선탠이 들어간 실드로 주름진 얼굴을 가리고 여름이지만 가죽 재킷으로 튀어나온 배를 두른다. 그 남자 원래 흉포하다. 그 남자는 주인공이다. 그는 모터사이클 라이더다.
김남훈 육체파 창조형 지식노동자·자동차는 비 올 때 우산 대용으로 쓰는 모터사이클 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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