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군대를 다녀온 힘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며칠 전 홍익대 쪽에 나갔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연극 포스터 속 글귀다. 대체 어떤 연극인지 별다른 정보가 없어서 내용을 추정할 방법은 없으나 저 글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눈치챌 수 있었다. 군대라는 공간은 계급이 지배하는 곳이고 계급은 시간의 축을 따라 생성된다. 대형 사고를 치지 않고 성실하게 복무한다면 병장이라는 권력을 통해 내무반 전체를 통솔할 수 있게 된다. 아마 그런 힘은 태어나서 처음 가져볼 것이다. 평범한 20대 남자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을 언제 할 수 있었으랴. 그래서 2년이 넘는 군대 생활 동안 느꼈던 수많은 억울했던 일, 부조리했던 경험은 ‘말년 병장’의 므훗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군대는 이처럼 ‘왕년에 잘나갔던 나’를 추억하고 나름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존감을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몇몇 중년들은 자존감 충전을 위해 굳이 군대를 소환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터사이클을 타기 때문이다.
봄이다. 눈이 맵고 기도에 무언가 낀 듯이 답답하지만 십수 년 전부터 봄의 전령사가 돼버린 황사와 미세먼지는 이제 익숙하기만 하다. 겨울 내내 지하주차장에 동면시켜놨던 바이크를 꺼내 배터리를 분리하고 충전을 시작한다. 방 안에 신문지를 깔고 배터리를 올려놓은 다음 충전기를 연결하고 하룻밤을 보내면 그걸로 끝이다. 빨리 자신을 장착하라고 재촉하는 듯 숨가쁘게 점멸하는 지시등을 보며 완충을 확인하고 다시 바이크에 장착한다. 이그니션 박스에 키를 넣고 돌리기 전에 한 번 호흡을 가다듬는다. 배터리가 완충되었음에도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기 때문이다. 찰칵, 가벼운 기계음과 함께 피스톤이 위아래로 몇 번 움직이더니 이내 맹렬한 기세로 회전수를 올린다. 엔진 열기가 차체로 퍼지며 여기저기서 열팽창 때문에 띵띵거리는 소리에 어디선가 들었던 유행가 후렴을 맞춰 콧노래로 부르는 무리수까지 둔다. 그만큼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중년의 라이더에게 여름은 버겁다. 회식 다음날 직장 상사와 반강제로 들어간 사우나실처럼 헬멧엔 불쾌한 뜨거움이 감돌고 라이딩 의류는 태양열과 체열을 머금으며 달궈진다. 가을은 생각보다 너무 쓸쓸하거니와 곧 닥칠 겨울이 걱정스러워 맘이 내키지 않는다. 겨울은 상상도 못한다. 목장갑을 끼고 가와사키 제퍼550으로 대관령을 넘은 기억이 있지만 그건 분명 대통령이 김영삼 아니면 김대중 때였다. 딱 지금 이 시기에 모터사이클을 탈 수 있을 만큼 타야 한다. 이때 머플러를 통해 배출된 배기가스만큼 자존감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 그 자존감을 바탕으로 1년을 살아간다. 이 글을 쓰다보니 허세가 모니터에 뚝뚝 떨어져내려 내 발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어쩌랴, 이게 바로 라이딩의 본질인 것을. 차를 타면 편한데 굳이 바이크를 타는 이유가 이것 말고 또 있겠는가. 모두들 안전하시길. May the traction with you(트랙션(구동력)이 함께하길).
김남훈 육체파 창조형 지식노동자·
자동차는 비 올 때 우산 대용으로 쓰는 모터사이클 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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