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와 말을 잇는 다리’. 라리사 히베이루의 작품. 팔레스타인의 도시와 전통 문양, 국기 색채, 날아오르는 새를 결합한 콜라주. 봉쇄를 넘어 이어지는 말과 기억을 형상화했다. 출처 : ADI 매거진
고통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 흔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독서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을 좀먹는 감각을 요구한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테프 아부 사이프의 ‘집단학살 일기’(두번째테제 펴냄, 2024년)는 2023년 10월7일부터 12월30일까지 가자에서 보낸 85일간의 일기를 엮은 책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이 시작된 초기의 기록이다. 처제 가족이 폭격으로 몰살되고 조카가 양다리와 한쪽 팔을 잃어버린 현실을 옮기며 번역자 백소하는 이렇게 썼다. “고통이 순식간의 스펙터클로 지나가지 않고 쓰인 글자 하나하나를 자기 속도로 읽고 이해하면서 정신을 좀먹는 감각은, 독서라는 행위를 더욱 괴롭게 한다.”
하지만 고통을 다루는 책을 읽다보면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은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한 지 벌써 1천 일을 넘겼다. 명목상의 정전에도 불구하고 공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국제사회의 무능과 방조 속에서 가자의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먼 땅의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를 번역한 사람들, 주말마다 거리에 모여 폭격 중단을 외친 사람들, 바다를 건너 가자로 항해한 사람들까지, 이 땅에서도 작지만 끊이지 않는 연대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 덕분에 가자지구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책도 읽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타인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의 의미를, 독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지식인 오카 마리는 ‘가자란 무엇인가’(두번째테제 펴냄, 2024년)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오해하지 말 것을 덧붙여 주문한다. “문학으로 인간성을 되찾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쓴 글에는 피가 묻어 있다. 가자지구 출신 번역가 알라 알카이시는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글항아리 펴냄, 2026년)에서 봉쇄된 가자지구의 굶주린 풍경으로 책을 시작한다. 그는 배고픔이 어떻게 사람을 몸 안에서부터 갉아먹는지 묘사한다. 조지 오웰의 말처럼 배고픔은 “사람을 완전히 등뼈도 뇌도 없는 것 같은 상태로 전락”시키고, 말과 존엄을 잃은 해파리 같은 존재로 만든다.
이런 참혹한 고통과 죽음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알카이시는 이런 한가로운 질문에 단호하게 답한다. “언어는 심지어 봉쇄 아래에서도 숨 쉴 자격이 있다.”
봉쇄된 가자에서는 휴대전화로 보내는 문자에 단어 하나를 덧붙일 때마다 전력 사정과 배터리 잔량, 통신 시간과 생명의 위험을 계산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긴 문장을 버린다”. 문장부호도 인사도 없이 “아직 살아 있어”라고 쓴다.
알카이시에게 글쓰기는 전쟁과 봉쇄가 축소해버린 말하기를 한 문장 한 문장 다시 늘리는 일이다. 그는 모든 문장을 짧게 줄이도록 강요당하는 장소에서 긴 문장을 계속 써나가려 한다. 길게 생각하고 길게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여전히 살아 있고 한 줄이 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선언이자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앙 속에서도 우리가 여기저기 헤매고, 살피고, 되돌아오는 문장들에 대한 권리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자의 상황을 번역해 타국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집단학살의 현실만이 아니라 전쟁이 지워버리려 하는 평범한 삶을 기록하는 일이기도 하다. 세계가 가자지구를 오직 비극과 고통으로만 재현하는 서사 속에 “공습이 닥치기 전 오렌지 꽃의 향기, 아침이 되면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도시 위로 흘러오는 기도의 부름, 금방이라도 파괴될지 모르는 교실에서 시를 낭독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끼워 넣는 것이다. 알카이시는 이런 일상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가자를 그저 고통이라는 추상으로만 존재하게 놓아두는 일을 거부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이 문학적 글쓰기에서 더 뼈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문학이 사망자 수치 속에서 사라진 이름과 기억, 삶의 구체성을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해보자. 문학으로 인간성을 되찾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니다. 애초에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숫자와 이미지로만 축소해온 우리다.

‘가자란 무엇인가’, 오카 마리 지음, 김상운 옮김, 두번째테제 펴냄, 2024년

‘집단학살 일기’, 아테프 아부 사이프 지음, 백소하 옮김, 두번째테제 펴냄, 2024년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 알라 알카이시 지음, 서제인 옮김, 글항아리 펴냄, 2026년

‘완벽한 피해자’, 모함메드 엘쿠르드 지음, 박종주 옮김, 마티 펴냄, 2026년
물론 글은 폭탄을 멈추지는 못한다.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출신 저널리스트 모함메드 엘쿠르드는 ‘완벽한 피해자’(마티 펴냄, 2026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인종학살의 와중에 글을 쓴다는 것이 고문같이 느껴지는 것은 비탄 때문만은 아니다. 2000파운드짜리 폭탄 앞에서 글이란 부끄러우리만치 모자람을 알아서다.”
그럼에도 그는 글을 쓴다. 문학적 글쓰기를 넘어 단호한 정치적 목소리를 낸다. 그는 인간의 조건 밖으로 내쫓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구 사회에서 동정을 살 만한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피해자성을 내세워야만 하는 역설을 고발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허락된 자리는 두 개뿐이다. “피해자 아니면 테러리스트다.”
테러리스트로 규정된 사람에게는 말할 기회도 애도받을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반면 피해자로 승인된 사람은 마이크 앞에 설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정치적 발언과 분노를 포기해야 한다. 개인적 불행은 말할 수 있지만 식민주의나 민족해방, 저항을 말해서는 안 된다. 테러리스트라는 유죄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해자라는 좁은 칸으로 엎드려 들어가야 한다.
그는 이를 ‘호소의 정치’라고 부른다. 호소의 정치 속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정당한 분노와 정치적 저항권을 박탈당하고, 그저 수동적으로 고통받는 ‘완벽한 피해자’가 될 것을 강요당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송곳니를 뽑혀야만” 서사화될 수 있다. “우리의 슬픔에는 이빨이 없다.”
이런 ‘인간화’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돼 있다.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고 어떤 표현이 위험한지 알며, 좋은 학력과 안정된 직업, 언론과 제도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경받을 만한 팔레스타인인’의 역할을 능숙하게 수행한다. 폭격 아래에서 욕설로밖에 고통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 난민과 빈민, 분노한 청년, 무장 저항을 선택한 사람은 ‘인간화’의 무대 밖으로 밀려난다. “인간화는 식민자가 아니라 피식민자가 비판적인 조사를 받게 만든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본래 너그럽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해방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비겁하거나 잔인한 사람이 있더라도 식민지배는 그 자체로 부당하다. 식민주의는 피해자의 품성이 아니라 추방하고 봉쇄하며 빼앗고 살해하는 식민자의 부정의에 의해 판단돼야 한다.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과 ‘완벽한 피해자’는 고통의 번역이라는 문제가 한가로운 학술적 논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가장 시급히 다뤄야 하는 정치적 과제임을 입증한다. 두 책의 저자 모두 “동정을 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값싼 동정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정치적 판단을 스스로 구성할 권리다.
그렇기에 그들은 시를 쓰고, 정치적 발언을 하고, 아랍어를 영어로 번역한다. 봉쇄가 축소한 말과 삶을 문학으로 회복하고, 피해자로 축소된 주체성을 정치적 언어로 복원한다. 알카이시가 말하듯 “세계가 변화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번역하지 않는 것은 항복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군사력에만 맞서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인간화하고 무관심을 조장하는 이미지와 서사의 틀에도, 완벽한 피해자일 때만 인간으로 승인하는 ‘인간화’에도 맞서고 있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시를 쓰고 번역하고 정치적으로 발언하며 언어로 투쟁하는 이유다.
이때 글과 책이란 폭력적 이미지와 틀에 맞서 싸우는 데 여전히 유용한 무기다. 글쓰기가 그들의 증언이자 정치적 발언이라면, 독서는 연대의 길로 안내하는 하나의 시작점이다. 기억하고 기록하며 증언하는 것이 저항의 한 형태라면, 그 증언이 사라지지 않도록 읽고 나누는 것 또한 저항에 연대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된다. 가자에 대해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옮길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는 일이면서도, 그 불완전한 언어가 여전히 서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임을 깨닫는 일이다.
실제로 봉쇄 속에 놓인 팔레스타인 작가들에게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는 외로움이다. 알카이시는 반복해서 이런 의문을 갖는다.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은 내가 번역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아니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든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지옥 같은 현실을 헤치고 도착한 증언이 있다면, 그들이 그것을 쓰고 우리가 읽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다시 한번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글쓰기와 독서는 아직 헛되지 않다. 물리적 봉쇄는 물자의 이동을 차단할 수 있지만, 언어가 건너가는 일까지 막지는 못한다. 가자에 대해 읽는다는 것은 그 미약한 연결을 붙잡고 이어가는 일이자, 우리의 언어와 마음마저 끝내 봉쇄되지 않도록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가장 처절한 순간에도 계속해서 쓰이는 가자의 문장들 앞에서, 우리는 글쓰기와 독서의 가치를 다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알카이시는 “가자를 번역한다는 것은 그저 올바른 단어를 찾는 일만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줄 귀를 찾아 헤매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귀가 될 수 있을까?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철학책 편집자
※철학책 편집자 박동수가 ‘지금 한국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철학 이야기’를 전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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