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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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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민주화가 절실하다

등록 2012-08-07 17:10 수정 2020-05-03 04:26
탐욕스런 금융자본을 민주화하기 위해선 금감원을 개혁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금융감독원에 시민들이 드나들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탐욕스런 금융자본을 민주화하기 위해선 금감원을 개혁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금융감독원에 시민들이 드나들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은행·증권사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의혹, 은행들의 가산금리를 이용한 20조원 부당 이득, 신한은행의 저학력자 금리 차별….

최근 금융자본의 탐욕과 공공성 망각을 잇달아 보여준 사건들이다. 금융자본이 사회적 책임은 외면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 극대화’만 추구하다가 빚어진 일이다. 금융산업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민 혈세로 조성한 160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살아났다는 점에서 국민의 분노는 더 크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니 보따리를 뺏는 격이다.

금융자본의 탐욕은 본능

금융은 본질상 공공성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남들이 맡긴 돈(예금)을 밑천 삼아 장사하는 것은 일종의 특혜다. 그래서 금융업은 하고 싶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부가 엄격히 자격을 심사해 소수에게만 사업 인가를 내준다. 금융산업의 공공성은 사회책임의 이행 요구로 이어진다. 하지만 한국 금융자본의 행태는 이런 사회적 눈높이에 미치지 못함을 보여준다. 공공성의 상실은 금융산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결국 금융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 역할을 한다.

금융자본의 탐욕과 공공성 상실은 비단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금융자본의 탐욕이 지목돼, 금융자본의 상징인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젊은이들의 항의와 점령운동이 벌어졌다. 최근 유럽에선 런던 은행 간 금리(Libor·리보) 조작 스캔들로 금융자본에 대한 불신이 더욱 고조됐다. 금융자본의 탐욕은 일종의 본능이다. 이를 적절히 제어하는 것이 정부(금융감독 당국)의 역할이다. 재벌의 탐욕을 제어하기 위해 정부의 적정한 시장 개입이 요구되는 것과 동일하다. 재벌뿐만 아니라 탐욕스런 금융자본에 대한 경제민주화, 즉 금융민주화가 요구되는 이유다.

하지만 금융감독 당국이 그동안 보여준 행태는 국민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하다. CD 금리 조작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진작부터 제기됐다. CD 발행이 부진해 실제 시장금리를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가산금리 문제도 오래전부터 지적됐던 일이다. 은행들이 합리적 기준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가산금리를 부과한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학력별 금리 차별도 은행 멋대로 시행한 게 아니라, 2008년 4월 금융감독 당국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 금융자본의 탐욕과 소비자 피해는 금융감독 당국의 부실 감독과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감독 당국은 뒤늦게 개선책 마련에 나섰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CD 금리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지표금리로 ‘단기 코픽스’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은행들이 가산금리를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 건 문제”라며 실태조사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모두 뒷북치기에 불과하다.

공정위의 CD 금리 담합 조사 이후 금융감독 당국의 수장들이 보여준 태도는 더욱 실망스럽다. 권혁세 금감원장은 “은행과 증권사 모두 (CD 금리 담합을 공정위에 자진 신고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CD 금리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담합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이들의 발언은 사실상 금융사들에 ‘담합을 부정하라’ ‘담합을 자진 신고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대단히 부적절하다. 담합 사실이 드러날 경우 불똥이 감독 부실 문제로 튈 것을 막으려는 속 보이는 행동이다.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 다 가진 괴물

‘금융민주화’의 첫 조처로 금융소비자 보호 기능 강화 필요성이 제기된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금융감독 당국은 지금껏 관치를 휘두르며 금융사들의 상전 행세를 하며 금융소비자 보호는 외면하고 금융사들의 이익만 챙겨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금융감독 기구와 금융사 간 유착은 저축은행 사태에서 잘 드러난다. 현직에서는 적당히 봐주기식 감독을 하고, 그만둔 뒤에는 금융사에 취업해 현직에 있는 후배들을 상대로 로비스트 노릇을 한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하지만 금융감독 기구가 제 구실을 하려면 한발 더 나아가 현행 금융감독 체계의 전면적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끊이지 않고 터지는 대형 금융 스캔들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금융감독의 정치적 독립성 미흡이 꼽힌다. 그 핵심에는 고질병인 모피아(금융관료)의 관치금융이 자리하고 있다. 모피아들은 감독 권한을 다른 정치적·정책적 목적에 오·남용하고 나중에 문제가 터졌을 때는 금융위원회의의 보조원에 불과한 금감원에 책임을 전가하는 행태를 되풀이해왔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현행 금융감독 체계를 금융감독 기능(브레이크)과 금융정책 기능(액셀러레이터)을 동시에 가진 괴물로 비유할 정도다. 이 괴물이 저지른 참사로는 2002~2003년의 신용카드 대란과 2011년 이후 저축은행 부실 사태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신용카드 대란은 외환위기 이후 내수 살리기의 일환으로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을 채택한 것이 빌미를 줬다. 금융감독 당국은 위기가 표면화되기 이전부터 위험성을 알고도 정부 정책에 눈치보기를 하다가 실기를 했다. 2000년대 초반 은행의 여신금지업종 폐지 및 신용카드 현금대출로 저축은행의 영업 기반이 크게 축소되자 민원 창구인 정치권이 저축은행 관련 각종 규제 완화를 요구했다. 금융감독 당국은 눈치보기를 하다가 예금자보호 한도 상향, 상호신용금고에서 상호저축은행으로 명칭 변경, 우량 저축은행에 대한 동일인 대출금액 한도 폐지 등을 승인했고, 이는 결국 부동산 대출에 몰빵한 저축은행들의 붕괴로 이어졌다.

금융감독 기구의 정치적 독립성을 제고하려면 자율성을 상실한 채 ‘관치금융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금감원을 금융위원회의 지배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금융정책 기능은 기획재정부로 옮기고, 금융감독 기능은 공적 민간기구에서 수행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금융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성 제고를 위해 비상임위원 수 확충, 국회 추천 신설, 위원 임기 연장, 시차임기제 도입 등의 방안도 제기된다.

금융감독 기구의 이해 상충 해소와 견제·균형 강화도 필요하다. 현행 금융감독 체제는 건전성 감독과 영업행위 감독(금융소비자 보호기능 포함)을 한곳에서 수행해 이해 상충 문제가 발생한다. 금융회사 건전성과 금융소비자 보호가 충돌하면 전자를 우선시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저축은행의 묻지마식 후순위채권 발행 묵인이나 은행의 키코(환헤지 통화옵션상품)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이를 개선하려고 현재의 단일 금융감독 체제를 건전성 감독과 영업행위 감독으로 쪼개, 이른바 오스트레일리아식 쌍봉 체제로 전환하는 방안도 제기된다.

금융감독 체계 개편 논의 본격화해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 선진국들은 대부분 금융감독 체계 개편을 추진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합리적 근거가 떨어지는 현행 체계를 여전히 고수하며 ‘우물 안 개구리’로 남아 있다. 이제 금융민주화를 위한 금융감독 체계 개편 논의를 본격화할 시점이다.

곽정수 한겨레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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