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정위는 시장경제를 감시하는 곳이지, 물가 당국이 아니다.” 박상용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이 지난해 12월14일 대통령 업무보고 내용 발표 뒤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2. “물가 관리에 신경 쓰라.”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월3일 김동수 신임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특별 당부를 했다. 김 위원장은 곧바로 공정위에서 취임식을 열고 “공정위가 물가 안정을 책임지는 부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근시안적 논리”라며 기존 논리를 180도 뒤집었다. 이어 5일에는 간부 전원을 불러놓고 “공정위가 물가 기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은 사표를 쓰라”고 엄포를 놨다.
#3. “김동수 위원장의 정책은 물가 관리보다 더 근본적인 시장경제의 재앙이다.” 허선 전 공정위 사무처장(현 법무법인 화우 수석컨설턴트)은 트위터 등에 김 위원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전직 공정위 고위 간부가 현직 공정위 수장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4. 김동수 위원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 1월10일 서민 생활과 직결된 가격 불안 품목의 전면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 대상에는 밀가루, 음료, 치즈, 김치, 반찬류 등이 총망라됐다.
#5. “공정위 직원들이 조사 명목으로 나와 괴롭히는 모습이 마치 조폭들이 자릿세 뜯으러 온 것과 흡사합니다.” 공정위 조사를 받고 있는 한 식품업체 고위 임원은 이렇게 한탄했다.
정부 기관이 물가 안정에 나서는 게 무슨 문제?이상은 공정위에서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약 한 달간 숨 가쁘게 진행된 일 중에서 중요한 대목만 간추린 것이다. 최근 공정위가 물가 관리 기관으로 나서는 게 옳으냐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듯하다. ‘시장경제의 파수꾼’이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가져온 공정위로서 이번 사안은 자칫 정체성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는 민감한 문제다. 또 국가경제와 기업 경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적잖은 국민은 이런 논란 자체가 어리둥절할 수 있다. 정부가 물가 안정에 총력전을 펴는 상황에서 기획재정부든 공정위든 모두 손발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공정위가 ‘물가관리위원회’로 전락할 경우의 폐해다. 당장은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부작용이 언젠가 경제 전체와 국민에게 돌아온다면 신중할 수밖에 없다. 공정위가 물가 관리 당국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는 7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공정거래법 제정과 공정위 설립 취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공정거래법 제정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60년대 중반부터다. 독과점 폐해와 그로 인한 물가 불안이 사회문제화할 때마다 추진됐지만, 업계의 반대에 밀려 번번이 무산됐다. 정부는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여파로 물가 불안이 이어지자, 1975년 말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물가 통제와 기업들의 경쟁제한 행위를 규제했다. 당시 정부의 물가 관리 방식은 국민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품목의 가격을 인상할 때는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는 직접적 통제였다. 하지만 정부의 전근대적 물가 관리는 곧 한계에 봉착한다. 제1차 오일쇼크 직후인 1974년부터 1981년까지 8년간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에 달하는 살인적 수준이었다. 정부는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독과점 규제를 통한 물가 불안의 근원적 해결과 경제 효율 달성을 위해 공정거래제도의 도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다. 또 10·26 사태라는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기존의 정부 주도형이 아닌 민간 자율의 경제질서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커진 것도 작용했다. 결국 1980년 말 시장경제 질서의 기본법으로서 공정거래법이 제정됐다. 공정거래법 제정의 주요 배경이 물가 문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취지는 정부가 민간의 가격 결정에 직접 개입·간섭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물가 불안의 근본 원인이 되는 독과점적 시장구조의 개선을 통해 경쟁 촉진, 공정거래 질서 확립이라는 시장경제 지향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둘째, 정부가 민간의 가격 결정에 직접 개입·간섭하는 것은 시장경제 원리에 맞지 않는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가격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곳에서 결정된다. 기업과 소비자는 이런 가격 정보를 바탕으로 재화의 생산량과 소비량을 각각 결정한다. 이는 경제 전체에 효율적으로 자원이 배분되는 토대가 되고, 시장경제의 강점이 된다. 정부가 민간의 가격 결정에 직접 개입하면 시장의 효율을 해치고, 시장경제의 강점이 사라진다.
공정위의 공든 위상 무너진다셋째, 정부의 직접적 물가 관리 방식으로는 물가 안정에 성공할 수 없다. 당장은 가격 인상을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상 요인이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한, 가격은 다시 용수철처럼 튀어오를 수밖에 없다. 반면 정상적인 공정거래법 집행은 실증적으로도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카르텔 규제는 담합으로 인한 가격 인상을 억제한다. 경쟁 제한적인 기업결합을 규제하는 것은 가격경쟁을 확보하고, 독점으로 인한 가격 인상을 방지한다.
넷째, 공정위의 조사 방식은 위법 소지가 있다. 공정위 고위 간부는 담합 조사와 관련해 “물가를 인위적으로 조정하겠다는 게 아니라, 담합 조사 등 그동안 해왔던 업무들을 강화해 자연스레 가격 인상이 억제되도록 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공정위 조사 대상은 최근 가격이 인상됐거나, 인상이 예상되는 품목을 망라한다. 공정위가 법에 따라 조사할 수 있는 것은 기업들이 가격을 올리면서 담합을 한 경우다. 가격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담합 조사를 하는 것은 사실상 기업에 가격 인상을 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가격을 인상한 경우에도 담합 혐의가 있어야 조사하는 게 정도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기업으로서는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공정위에 협조할 수밖에 없다. 이는 중·장기적으로 기업의 설비투자, 기술개발, 고용 등에 불확실성을 키우면서 기업 경영에 악영향을 준다.
다섯째, 이명박 정부가 핵심 국정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정책에도 역행한다. 대기업들이 가격 인상 요인이 있는데도 공정위의 압력으로 포기할 경우 그 부담을 중소기업에 전가할 위험이 커진다. 제조 대기업은 부품이나 원자재 납품업체에 떠넘기고, 유통 대기업은 입점업체와 납품업체에 떠넘기는 것이다.
여섯째, 공정위의 시장경제 파수꾼으로서 본연의 업무가 위축되거나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 공정위는 물가 안정 전담조직으로 ‘가격불안품목 감시·대응 TF’를 급조했다. 여기에는 시장감시국, 카르텔조사국, 소비자정책국 등 공정위 3개 핵심 부서를 배속했다. 이들 3개국은 지난 1월10일부터 사실상 물가 안정을 위한 기업 조사에 올인하고 있다. 공정위 고위 간부는 “공정위의 기존 업무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지만 궁색하다.
일곱째, 그동안 공정위가 공들여 쌓아온 국제적 위상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공정위는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걸 큰 자랑으로 여겨왔다. 세계적인 경쟁 분야 전문지인 영국 (GCR)이 실시하는 각국의 경쟁당국 평가에서 한국 공정위는 6~7개국이 속한 ‘가장 우수한 그룹’에 올라 있다. 또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쟁위원회에서 부위원장국으로 오랫동안 활약 중이다. 공정위 출신의 한 로펌 인사는 김동수 위원장 취임 이후 해외 로펌 인사로부터 “공정위 업무에 전문성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도 없느냐”는 연락을 받고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털어놨다.
공정거래 업무 문외한에 MB의 대학 후배김동수 신임 공정위원장은 임명 때부터 논란이 됐다. 물가 관리가 주된 경력으로, 공정거래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없고, 대통령과 같은 고려대 출신이다. 공정위를 앞세워 물가를 억제시키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할 수 있는 대학 후배를 임명한 ‘정치적 인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비정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은 가도 그 후유증은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공무원에게 영혼이 없다고 하지만, 요즘 공정위 직원들의 얼굴색이 어두운 것도 이런 속사정 때문이다. 공정위는 오는 4월1일 설립 30주년을 맞는다. 성년으로서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시점에, 정반대로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동수 위원장 시절은 공정위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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